제목: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앞 범퍼가 이상했다.
몇일 전 아파트 주차장에 자리가 없어서 도로변 임시 주차공간에 차를 댄 것이 화근이었다.
‘찍혔다… 누군가 박았다.’
손끝이 움푹 파인 플라스틱 위를 천천히 따라갔다. 약간 벗겨진 페인트, 살짝 일그러진 곡선. 가슴이 ‘툭’ 내려앉았다. “이게 언제 생긴 거지?” 누구 하나, 쪽지 하나, 죄송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었다. 기분이 묘하게 뒤틀렸다.
그날 밤, 조용한 거실에서 블랙박스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USB 리더기를 노트북에 꽂고, 영상 파일을 하나하나 넘겼다. 눈은 모니터에, 손은 재생바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제발… 나와라.”
그리고 마침내,
모퉁이를 돌던 흰색 1톤 탑차가 후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속도는 느렸지만 방향이 불안정했다.
그리고 퍽.
순간, 내 차 앞범퍼가 움찔하며 흔들렸다.
“잡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번호판이 안 보였다. 각도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관리사무소로 달려갔다.
“CCTV 좀 확인할 수 있을까요?”
관리인은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컴퓨터를 조작했다.
화면 속 시간대가 재생되었다.
아파트 입구를 통과하는 그 탑차, 그리고 선명하게 보이는 번호판.
“이거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곧장 연락처를 받아들고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몇 번 울리더니,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누구시죠?”
나는 조심스럽게 상황을 설명했다.
잠깐 정적이 흐르고, 그가 말했다.
“그런 일, 없었습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영상이 있습니다. 보여드릴게요.”
내 말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몇 분 뒤, 영상 파일을 전송했다.
잠시 후 다시 걸려온 전화.
“제가 운전한 게 아니라… 그날은 대리기사를 불렀습니다. 제가 술에 좀 취해 있어서 기억이 잘 안 납니다.”
황당함이 차올랐다.
기억이 없다는 말은 책임을 피하려는 고전적인 문장이었다.
나는 대리기사의 번호를 요청했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경찰에 접수하겠습니다.”
그제야 전화가 걸려왔다.
어색한 목소리.
“죄송합니다. 보험으로 처리하겠습니다…”
며칠 뒤, 차는 수리되었다.
하지만 범퍼의 미세한 틈, 원래의 곡선을 잃은 그 부분은 여전히 거슬렸다.
깨끗해진 듯했지만 완전한 복원은 아니었다.
그 흠집은, 마치 내 마음 어딘가에도 똑같이 생긴 자국 같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마음속에도 그런 ‘범퍼 자국’이 있다.
누군가의 무심한 말,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없이 지나간 억울한 일들.
시간이 지나면 표면은 아물지만, 가까이 보면 티가 난다.
그리고 그 자국들은 우리를 조용히 바꾸어 놓는다.
그 일을 겪고 나서 다시금 느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수를 어떻게 대하느냐가 그 사람의 품격이고, 사회의 수준이다.
상식이 통하고, 진심이 통하는 사회.
그건 거창한 이상이 아니라, 작은 사고 앞에서 보이는 태도 하나로 만들어질 수 있다.
앞범퍼는 다시 도색되었고,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오늘도 마음속으로 속삭인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책임있는 사회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상식이 살아 있고, 진심이 통하는 세상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