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석의 목소리들 ...

: 뛰지 않는 자들이 가장 크게 외친다.

by SOLUNA

프롤로그: 경기장 밖의 전문가들


중남미에서 축구를 보다 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경기장 관중석은 언제나 전술 전문가들로 가득하다. 감독보다 더 정확하게 포메이션의 문제를 짚어내고, 선수보다 더 유창하게 드리블 타이밍을 설명한다. 골을 놓치면 "내가 찼으면 넣었다"는 말이 관중석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그들은 절대 그라운드에 내려가지 않는다. 내려갈 생각도 없다. 관중석이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가장 목소리가 잘 울려 퍼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 유튜브 생태계를 보며, 나는 그 관중석을 떠올린다.


매불쇼가 있고, 김어준이 있고, 수십 개의 극우 채널이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그들은 매일 수십만 명의 시청자 앞에서 대한민국 정치를 해설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누가 나쁜지, 어떻게 했어야 하는지를 유창하고 자신감 넘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그라운드에 내려가지 않는다.


1. 말의 공장, 책임의 진공


유튜브 정치 평론의 가장 큰 특징은 말의 생산 비용이 제로(zero)에 가깝다는 것이다. 신문 칼럼은 편집자의 검토를 거친다. 방송 패널은 최소한의 팩트체크가 따른다. 하지만 유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쏟아지는 말들은 아무런 여과 장치가 없다. 틀려도 괜찮다. 다음 방송에서 슬쩍 넘어가면 된다. 과격하게 말할수록 알고리즘이 더 많이 밀어준다. 자극적일수록 구독자가 늘어난다.


말의 생산 비용이 없으니 책임의 무게도 없다. "내가 집권하면 이렇게 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공기 중에 흩어진다. 실제로 집권할 일이 없으니 검증받을 일도 없다. 정책의 부작용을 고민할 필요도, 예산을 어떻게 조달할지 따질 필요도 없다. 그저 말하면 된다. 시원하게, 크게, 자주.


이것이 관중석 평론의 본질이다. 책임 없는 언어의 무한 생산.


2. '뛰면 잘할 것 같은' 착각의 구조


관중석에서 경기를 보는 사람은 선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높은 곳에서 전체 그라운드를 내려다본다. 선수가 보지 못하는 공간이 보인다. 상대 수비 진형의 빈틈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든다. "저기로 패스해야 하는데. 왜 저걸 못 하지?"


그러나 실제 그라운드에서 선수는 전혀 다른 조건 속에 있다. 상대 수비수가 몸을 부딪혀온다. 90분을 뛰어 다리가 무겁다. 감독의 전술 지시와 팀원의 움직임을 동시에 읽어야 한다. 관중석에서 '간단해 보이던 패스'는 그라운드에서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유튜브 스튜디오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왜 저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하느냐", "왜 저 결정을 내리지 못하느냐"를 외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실제 정치는 이해관계의 충돌, 연립 방정식 같은 의회 수 계산, 행정부의 관료적 저항, 언론의 프레임, 여론의 변덕, 예산의 한계를 동시에 다루는 일이다. 관중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라운드를 가득 채우고 있다.


유시민 처럼 유창한 평론가가 유능한 정치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말하는 능력과 실행하는 능력은 전혀 다른 근육을 쓴다. 그리고 관중석의 평론가들은 실행 근육을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3. 알고리즘이 만드는 극단의 생태계


문제는 이 구조가 점점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분노와 자극에 반응한다. 차분하고 균형 잡힌 분석보다 "저 XX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외침이 더 많은 클릭을 유발한다. 알고리즘은 그 패턴을 학습하고, 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더 많이 노출시킨다. 평론가들은 그 알고리즘의 논리에 적응한다. 더 강하게, 더 단정적으로, 더 적을 명확하게 지목하는 방향으로.


그 결과 좌파 유튜브와 극우 유튜브는 서로를 먹고 자란다. 매불쇼가 극우를 자극하면 극우 채널이 반응하고, 극우 채널의 반응이 다시 매불쇼의 소재가 된다. 이 순환 구조 속에서 시청자들은 각자의 진영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상대방은 점점 더 악마가 되고, 우리 편은 점점 더 영웅이 된다.


이 생태계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누구인가. 실제로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한쪽에서는 배신자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부역자가 된다. 타협과 조정이라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과정이 "졌다" 혹은 "팔았다"는 언어로 소비된다. 정치가 점점 더 불가능한 직업이 되어간다.


4. 중남미가 걸어간 길


이 현상이 낯설지 않은 이유가 있다. 중남미에서 이미 본 풍경이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라디오와 TV의 달변가였다. 그는 수십 시간의 생방송을 혼자 진행하면서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빈민을 위한 혁명을 외쳤다. 그의 언변은 탁월했다. 관중은 열광했다. 하지만 그가 실제 국가를 운영하자, 말의 화려함과 현실의 복잡함 사이의 간극이 드러났다. 석유 수입에 의존한 포퓰리즘은 유가가 하락하자 무너졌고, 베네수엘라 경제는 붕괴했다.


브라질에서도 좌우를 막론한 극단적 정치 유튜버들이 201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궜다. 그들이 만들어낸 극도의 양극화 속에서 보우소나루가 등장했고, 그 이후의 혼란은 브라질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관중석의 목소리가 그라운드를 지배하기 시작할 때, 그 사회는 위험해진다.


5.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평론가들을 침묵시키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판과 해설은 민주주의에 필요하다. 문제는 비판의 질이다. 책임 없는 말과 책임 있는 말은 다르다. "저 정책은 틀렸다"와 "저 정책은 이런 이유로 틀렸으며, 대안은 이것이다"는 전혀 다른 발화다. 전자는 관중석의 야유이고, 후자는 그라운드를 향한 진지한 제안이다.


시청자인 우리도 달라져야 한다. 내가 공감하는 말을 유창하게 해주는 평론가를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평론가가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뛸 능력이 있는지, 그의 말이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한 번쯤 물어야 한다.


"저 사람 말이 시원하다"와 "저 사람 말이 옳다"는 전혀 다른 판단이다. 그 두 가지를 혼동하기 시작할 때, 관중석의 목소리가 그라운드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에필로그: 진짜 목소리는 그라운드에서 나온다


태평양 너머에서 한국을 바라보면서 가장 걱정스러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말이 너무 많고, 실행이 너무 적다. 비판은 넘치고, 대안은 드물다. 관중석은 포화 상태이고, 그라운드는 점점 더 혼잡해진다.


진짜 목소리는 그라운드에서 나온다. 실패를 감수하고 내려간 사람, 몸을 부딪히며 현실과 씨름한 사람, 틀렸을 때 책임을 진 사람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크지 않을 수 있다. 유창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실제로 그라운드를 바꾼다.


관중석에서 가장 크게 외치는 사람이 가장 옳은 사람인 척하는 시대. 그 시대를 끝내는 것은 정치인도 언론도 아니다. 시청자인 우리가 채널을 어디에 맞추느냐가 그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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