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념 깃발로 공허함을 덮는 정치 패턴
중남미에서 오래 살다 보면 하나의 패턴이 눈에 익는다.
몰락한 정치 세력이 마지막으로 붙드는 것은 언제나 이념의 깃발이다. 정책은 없고, 비전은 없고, 국민의 삶을 바꿀 의지도 없지만, 깃발만큼은 화려하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주의자들이 '혁명'을 외쳤던 것처럼,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자들이 '민족'을 소환했던 것처럼, 그들은 이념의 언어로 자신의 공허함을 덮는다.
지금 대한민국의 이른바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을 바라보며, 나는 그 익숙한 냄새를 맡는다. 그들은 정말 보수인가. 아니면 보수라는 이름을 빌려 쓰는 참칭자(僭稱者)인가.
보수주의(Conservatism)의 본질은 무엇인가.
에드먼드 버크로부터 시작되는 보수의 철학은 단순히 "변화를 거부한다"가 아니다. 그 핵심은 사회가 오랜 시간 쌓아온 가치, 제도, 공동체를 경솔한 변화로부터 지키는 것이다. 시장의 자유, 법치주의, 재정 건전성, 강한 안보 — 이것이 보수가 지켜야 할 실질적 가치들이다.
그렇다면 지금 스스로를 보수라 부르는 세력은 무엇을 지키고 있는가. 법치주의를 지키는가. 헌정 질서를 뒤흔드는 불법 계엄을 옹호하거나 침묵했던 세력이 법치를 말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타락이다. 재정 건전성을 지키는가. 집권 기간 동안 국가 채무를 폭발적으로 늘려놓고 재정 보수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다. 시장의 자유를 지키는가. 특정 기득권과 카르텔을 보호하면서 시장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독점의 수호다.
보수의 언어를 쓰지만 보수의 가치를 지키지 않는 세력. 이것이 참칭 보수의 정의다.
참칭 보수의 가장 효과적인 생존 전략은 이념 논쟁이다.
"저들은 좌파다", "빨갱이 정책이다", "사회주의로 가고 있다" — 이 언어들은 실제 정책 논쟁을 차단하는 연막탄이다. 연막이 피어오르면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질문을 잊는다. 집값은 왜 오르는가. 청년들은 왜 결혼을 포기하는가. 지방은 왜 소멸하는가. 중소기업은 왜 대기업의 하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이 질문들에 답해야 하는 순간, 이념의 연막이 걷히고 무능과 무책임이 드러난다. 그러니 연막은 계속 피워야 한다.
1991년 소련이 붕괴했을 때, 냉전의 언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야 했다.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 담론에서 여전히 '빨갱이'와 '종북'이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언어가 실제 위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차단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증거다.
중남미의 오래된 우파 정치인들도 똑같은 전략을 썼다. 콜롬비아의 기득권 세력은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게릴라 동조자'라는 딱지를 붙였다. 과테말라의 군부 엘리트는 빈농의 토지 요구를 '공산주의'로 규정했다. 이념의 딱지는 논쟁을 끝내는 가장 편리한 도구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수십 년의 정체와 불평등이었다.
보수가 진짜 보수이려면, 지킬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책으로 구현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짜 보수가 지켜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첫째,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는 질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한 갑을 관계, 플랫폼 독점, 부동산 카르텔 — 이것들은 시장의 실패다. 진짜 보수라면 시장의 자유를 내세우면서 독점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공정한 경쟁 질서를 만드는 것이 진짜 시장 보수다.
둘째,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다. 포퓰리즘적 복지 확대도 문제지만, 세수 기반을 무너뜨리는 무분별한 감세도 문제다. 국가 재정은 미래 세대와의 계약이다. 그 계약을 지키는 것이 진짜 재정 보수다.
셋째, 법치와 헌정 질서다. 법 앞에 예외는 없다. 권력자도, 검찰도, 군부도 헌법 위에 설 수 없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진짜 법치 보수다. 불법을 저지른 자를 감싸는 것은 법치가 아니라 패거리 문화다.
넷째,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이다. 저출생, 지방 소멸, 청년 세대의 절망 — 이것은 공동체의 붕괴 신호다. 이 문제들에 실질적인 해법을 내놓는 것이 진짜 공동체 보수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지금의 참칭 보수에게서 진지하게 추진되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이 이념 논쟁의 프레임을 유지하는 데는 참칭 보수만의 책임이 아니다. 언론도 공범이다.
정책 대결의 프레임은 복잡하다. 재정 승수 효과, 노동 유연성의 경제적 함의, 부동산 공급 탄력성 — 이런 언어로 뉴스를 만들면 시청자는 채널을 돌린다. 반면 이념 대결의 프레임은 단순하고 자극적이다. '좌파 대 우파', '친북 대 반공', '빨간색 대 파란색' — 이 구도는 스포츠 중계처럼 편을 가르고 흥분을 유발한다. 시청률이 오른다. 클릭이 늘어난다. 광고 수익이 따라온다.
결국 언론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념 대결의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구조적 인센티브를 갖고 있다. '오늘의 이슈는 ○○ 장관의 발언을 둘러싼 좌우 격돌'이라는 헤드라인이, '○○ 정책의 수혜자와 피해자 분석'이라는 헤드라인보다 조회수가 높다는 것을 편집국은 이미 알고 있다.
중남미에서도 이 현상은 반복되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주요 언론은 오랫동안 좌우 이념 대결을 메인 프레임으로 삼았다. 그 사이 정작 국민의 삶과 직결된 불평등 구조, 공교육 붕괴, 부패 카르텔에 대한 심층 보도는 뒷전으로 밀렸다. 이념 논쟁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동안, 국가의 실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누적되었다.
언론이 이념 대결을 '콘텐츠'로 소비하는 한, 참칭 보수는 생존할 수 있다. 이념 논쟁이 뜨거울수록 정책 무능은 가려진다. 언론의 프레임 선택은 단순한 편집 결정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치가 살아남고 어떤 정치가 퇴출되는가를 결정하는 구조적 권력이다.
진짜 저널리즘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당신의 이념이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의 정책이 국민의 삶을 어떻게 바꿉니까." 그 질문을 던지지 않는 언론은, 참칭 보수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다.
대한민국 정치의 테마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좌파 대 우파', '진보 대 보수', '친북 대 반공' — 이 언어들은 20세기의 유물이다. 지금 국민이 살고 있는 21세기의 현실과 아무런 접속점이 없다. 지금 국민이 원하는 정치의 테마는 단순하다.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과 그 국민이 모두 잘 사는 나라를 만들 것인가.
일하는 사람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나라. 어디서 태어났든 공정한 출발선이 주어지는 나라. 노인이 존엄하게 늙을 수 있는 나라. 청년이 꿈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지방에 살아도 기회가 있는 나라. 이것은 좌파의 어젠다도 아니고 우파의 어젠다도 아니다. 정치의 기본 임무다.
진짜 보수라면 이 임무를 보수의 방식으로, 즉 시장과 자유와 법치의 언어로 구현해야 한다. 진짜 진보라면 이 임무를 진보의 방식으로, 즉 분배와 연대와 공공성의 언어로 구현해야 한다. 두 방식은 경쟁해야 하고, 그 경쟁이 민주주의를 작동시킨다.
그러나 이념의 연막만 피우고 국민의 삶에 대한 답은 없는 세력이 그 경쟁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 없다. 그들은 경쟁자가 아니라 경쟁을 방해하는 자들이다.
중남미의 우파 정치가 실패한 이유는 좌파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우파를 자처하면서 시장을 독점 카르텔에게 넘겨주고, 법치를 선택적으로 적용하고, 재정을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탕진하고, 국민의 삶에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 공백을 포퓰리즘이 채웠고, 차베스와 마두로 같은 인물들이 등장했다.
역설적이게도, 참칭 보수가 득세한 사회에서 진짜 좌파 포퓰리즘이 자란다. 국민이 기성 보수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낄 때, 그들은 급진적인 대안으로 돌아선다. 중남미의 20세기가 그것을 반복해서 증명했다.
대한민국이 그 길을 가지 않으려면, 참칭 보수를 참칭 보수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진짜 보수, 즉 국민의 삶을 구체적인 정책으로 개선하려는 실용적 우파가 자라날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태평양 건너편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보면 하나의 확신이 든다.
대한민국 국민은 이미 이념 논쟁에 지쳐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더 선명한 좌파도, 더 선명한 우파도 아니다. 자신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다. 내 집 마련이 가능한 세상,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환경, 열심히 일하면 보답받는 사회.
이 단순하고 절박한 요구에 답하는 정치 세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자격이 있다. 보수라는 이름을 도용해 이념의 연막만 피우는 세력이 아니라. 참칭 보수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그 자리에 진짜 정치가, 즉 국민의 삶을 중심에 두고 경쟁하는 정치가 들어서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