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안은 없고 오로지 반대만 있는 ...
중남미에서 오래 살다 보면 하나의 패턴이 눈에 들어온다.
경제가 어렵고, 민생이 흔들리고, 국민이 지쳐갈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정치 세력이 있다. 그들은 해법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적을 만든다. '저 사람들이 이 나라를 망쳤다', '저 이념이 우리 것을 빼앗아 갔다', '저들과 싸워야만 우리가 산다'는 언어로 광장을 채운다. 아르헨티나에서, 베네수엘라에서, 브라질에서 그 공식은 반복되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국민은 더 가난해졌고, 사회는 더 분열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의힘을 보며, 나는 그 익숙한 냄새를 맡는다.
보수주의 이념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시장 원리에 대한 신뢰, 재정 건전성에 대한 강조, 안보 우선주의 — 이것은 오랜 역사를 가진 정치 철학이며, 국민 다수가 공감하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이념이 도구가 아닌 방패로 전락할 때다.
어떤 정책 제안이 등장하면 그것의 실효성, 재원 조달 방식, 예상 부작용을 따지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국민의힘은 그 과정을 건너뛴다. '누가 주장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먼저 결정되고, '무엇을 주장하느냐'는 그다음 문제가 된다. 정책 논쟁이 아닌 진영 전쟁이다.
중남미 정치를 오랫동안 관찰해 온 사람으로서 말할 수 있다. 이념이 정책을 대체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 정당은 국민의 삶에서 멀어진다.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켜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나침반은 오직 하나만 가리키고 있다. '우리 편이냐, 적이냐.'
지금 대한민국이 당면한 문제들을 떠올려 보자.
저출생과 고령화, 청년 실업과 부동산, 기후 변화와 에너지 전환, 인공지능 시대의 노동 시장 재편, 공공의료의 위기. 이 중 어느 하나도 이념 구호 하나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없다. 모두 정교한 현실 분석과 실현 가능한 대안이 필요한 난제들이다.
그렇다면 국민의힘은 이 문제들에 대해 어떤 그림을 제시하고 있는가?
저출생 문제가 논의되면 이민 정책 비판이나 전통 가치 강조가 등장한다. 부동산 문제에는 '규제 완화'라는 만능 처방이 반복된다. 에너지 이슈에서는 원전 찬반 논쟁으로 프레임이 좁아진다. 이것이 정책인가, 아니면 포지셔닝인가.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가 100년 가까이 아르헨티나 경제를 갉아먹은 것은 단순히 나쁜 정책 때문만이 아니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였다. 대안 없는 반대, 구호로만 채워진 야당, 현실을 외면한 이념 경쟁 — 그 합작품이 한때 세계 10위권이던 경제 대국을 만성 채무국으로 만들었다. 한국의 야당이 그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념 논쟁이 위험한 진짜 이유는, 그것이 실제 문제를 가리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집을 살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의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경제적 불안인데, '가족 가치관의 붕괴'라는 진단이 얼마나 그 현실에 닿아 있는가. 저임금 노동자가 늘어나는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지 않고 '노동 유연화'만 반복하면, 정작 고통받는 사람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념 논쟁의 가장 큰 폐해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진영 대결로 환원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정책도 그 자체의 장단점으로 평가받지 못한다. '저쪽 정책이니 반대', '이쪽 정책이니 찬성'의 구도만 남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전가된다.
콜롬비아 내전이 반세기를 넘어 지속된 것은 양측 모두 이념의 언어를 내려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성이 멈춘 것은 어느 한 쪽의 이념이 승리했을 때가 아니었다. 현실의 문제 — 토지, 빈곤, 지역 불균형 — 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구체적으로 협상했을 때였다. 이념은 투쟁의 연료일 수 있지만, 문제 해결의 도구는 아니다.
야당이 해야 할 일은 반대만이 아니다. 반대에도 내용이 있어야 한다.
"이 정책은 이런 이유로 효과가 없으며, 우리는 이런 대안을 제안한다." 이 구조가 있어야 진짜 반대다. 그렇지 않은 반대는 정치적 발언권의 낭비다.
세계의 유력 보수 정당들을 보면 단순한 반대 정당에 머물지 않는다. 독일 기민당은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독자적 비전으로 복지와 시장을 통합해왔다. 영국 보수당은 노동당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경제 철학을 정책으로 구현해왔다. 칠레의 피녜라 정부는 좌파 정권과의 차별화를 이념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경제 수치와 성장 지표로 증명했다.
보수의 본질은 변화에 대한 신중함이지,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니다. 진짜 보수라면 변화가 필요한 현실을 직시하되, 그 변화가 사회의 근간을 흔들지 않도록 설계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 역할을 포기하고 이념 수비대로만 남으려 한다면, 보수는 점점 더 좁은 지지층 안으로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이 점은 반드시 짚어야 한다.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사람들 역시 부동산 문제로 고통받고, 노후를 걱정하며, 자녀 교육비에 허리가 휜다. 그들 역시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구체적인 정책 비전 대신 이념 논쟁에만 집중한다면, 그 지지자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는 누가 대변하는가.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세 번의 낙선 끝에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좌파 이념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가 구체적인 '기아 제로' 정책과 저소득층 주거 프로그램으로 실질적인 삶의 변화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념이 아닌 삶의 문제로 유권자에게 다가갔을 때, 그것이 표가 되었다.
이념 논쟁만 하는 정당은 선거 때마다 '차악을 고르는' 구도를 만들어낸다. 그 구도에서 이기더라도, 그것은 지지가 아니라 소거(消去)다. 그런 승리는 오래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정치인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절반의 진실이다.
중남미에서 포퓰리즘이 반복적으로 득세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념의 언어에 쉽게 반응하는 유권자 구조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국민이 페론주의를 수십 년간 지지한 것은 단순히 속아서가 아니다. '우리 편'이라는 감각, 적을 향한 분노의 카타르시스가 정책의 실효성보다 더 강력한 동원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유권자가 원하는 것을 준다. 유권자가 이념 싸움을 원하면 이념 싸움을 하고, 유권자가 정책 경쟁을 요구하면 정책 경쟁을 한다. 이것이 냉혹한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다.
그렇다면 질문은 정치인을 향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한다. 우리는 뉴스를 볼 때 '저쪽이 또 무슨 짓을 했나'를 먼저 찾는가, 아니면 '이 정책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먼저 따지는가. 특정 정당의 정책 공약집을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내놓은 법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한 적이 있는가.
정책과 대안의 싸움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그것을 요구하는 시민의 힘이다. '저 사람이 싫다'는 감정이 아니라, '저 정책은 이래서 부족하고, 나는 이런 대안을 원한다'는 구체적인 목소리가 광장을 채울 때, 정치인들은 비로소 이념 구호 대신 정책 파일을 펼치기 시작한다. 유권자의 의식 수준이 정치의 수준을 결정한다. 이것은 중남미 50년의 역사가 반복적으로 증명해온 교훈이다.
태평양 너머에서 한국을 바라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대한민국은 중남미가 갖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 교육받은 시민, 높은 정치 참여율,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 2024년 광장의 촛불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 잠재력이 이념 싸움의 소모전으로 낭비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국민의힘이 가진 고유한 가치와 철학이 있다.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도 있다. 문제는 그 가치와 철학이 정책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국민이 원하는 것은 더 선명한 이념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이다. 그 나은 삶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야당이 그 이야기를 시작할 때, 비로소 진짜 정치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