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읽은 책이 없다. 독서모임 회원들이 바빠서 1월 모임을 3주나 건너 뛰었다. 모임을 쉬자 나도 같이 게을러졌다.
책 대신 요양병원에 가서 점점 기억이 사라지는 시아버님 이야기를 2회 녹음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시더니, 일주일 후에 가니 그동안 잃어 버린 기억을 되살리려 애쓰셨던 모양이다. 아버님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기억해 내셨다. 어쩌면 이야기하기가 뇌세포를 활성화 시켜 치매를 늦출 수도 있겠다 싶었다.
요양병원 면회실에서 휴대폰 녹음 기능을 켜면서 아버님의 가장 좋았던 시절은 언제였는지 물었다. 그러자 지난 주 말하지 못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셨다. 요거트 한 통을 비운 얼굴에 온기가 돌았다. 잠깐 침묵이 있은 후 이야기를 천천히 시작하셨다. 이야기는 한 올의 실만 남은 듯하다가도 다시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국민학교 시절, '땅 따먹기'라는 놀이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남자애나 여자애나 공기놀이와 땅따먹기 놀이를 많이 했단다. 땅바닥에 앉아 작은 돌맹이를 손가락으로 튕겨 보내 다시 돌아오게 하는 놀이인데, 튕겨 간만큼 금을 그어 땅을 넓히는 놀이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는 아이가 이긴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골목에 앉아 땅따먹기를 하니까 지나가던 어른들이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아이들이 저렇게 땅따먹기를 하는 것을 보니 곧 전쟁이 나겠어."
그리고 6.25 전쟁이 났다고 했다. 곧 이어 전쟁 당시 이야기로 이어갔다.아버님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산 와룡마을은 전쟁이 나도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사람들이 이 골짜기로 피난을 왔다고 한다. 아버님은 할아버지와 함께 와룡산으로 피해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산에서 하루만에 내려왔다고 했다. 와룡산은 높고 골이 깊어 빨갱이들이 숨기에 좋았다고 했다. 밤에는 빨갱이들이 마을로 내려와 마을 첢은이들과 이야기하고 낮에는 순경들이 와서 그 빨갱이들하고 이야기한 사람들을 죽도록 때렸다고 했다. 아버님은 어려서 크게 피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무서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아버님은 술래가 되어 숨어 있던 이야기들을 찾아냈다. 어설프게 숨어 있던 이야기들, 놓친 기억과 남아 있는 기억 사이에서 아버님은 지금만큼은 남아 있는 기억 쪽에 서 계셨다. 이런 날들이 얼마나 더 있을까 먹먹했지만 지금이라도 남아 있는 기억을 찾아낼 수 있어 반가웠다.
집에 돌아와 녹음된 이야기를 재생하다가 1월의 책은 결국 아버님이 아닐까 싶었다. 활자 대신 목소리로 읽는 책. 점점 사라지는 기억을 붙잡아 두는 책, 아버님의 이야기가 꽁꽁 숨어 찾을 수 없을 때까지 아버님 읽기는 계속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