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란 인생의 숙제를 풀어가는 것
남편이랑 걷는데 “요즘 조경 관리를 안 하나 보네.” 그런다.
그러고 보니 집 주변 거리에 작년보다 잡초가 많다. 그런데 이 이름 모를 풀과 꽃들이 밉지 않다. 어린 그 시절, 내가 참으로 좋아했던 것들이다.
계란프라이를 닮은 풀꽃, 꺾어서 팔찌를 만들던 토끼풀, 하늘 높은지 모르고 솟아오르는 날렵한 풀들. 그 속에서 많이 뛰어다니고 날아다녔다.
그때의 나처럼 우리 아이도 이 풀꽃들을 참 좋아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내 딸도 7살을 지나간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
7살이 되고 부쩍 큰 아이를 보며, 가는 세월이 아쉬워 어릴 때 사진을 자주 본다. 열만 안 나길, 잠만 잘 자길, 밥만 잘 먹길. 이런 것들을 바랐던 내 마음도 떠올랐다. 낯을 가리던 아이라 놀이터에서 기구 하나씩 시도하는 것도 일이었는데, 아무도 없는 이른 아침에 놀이터를 찾아 아이가 혼자 마음껏 즐기게 했다.
문화센터 수업에 가면 들어가질 못하는 아이라 수업 다 끝날 때까지 아이와 창밖에서 바라만 봤다. 수업 마치고 사람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면 그때 교실로 들어간다. 아이는 그래도 경험했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그 시간마저 행복해하곤 했다. 기다려주니 아주 천천히 나아가는 아이가 참 기특했다.
그러던 아이가 모든 세상이 제 것인 마냥 누비고 디닌다. 거리낌 없이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건다. 대견하다 싶으면서도, 그때 그 마음을 잊고 요구하는 게 많아진다. ‘작은 소리로 말해. 양보도 해야지. 올라가지 마.‘
해야 하는 것도 많아졌다
나는 세 살 때 받침 없는 한글을 뗐다. 지금 생각해 보면 통으로 문자를 외웠던 것 같은데 엄마는 그렇게 하고 많은 양의 전집을 내가 혼자 읽게 했다. 책 내용이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고 글자만 보던 느낌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그게 싫어 아이에게 한글을 빨리 가르치지 않았다. 관심사를 채워주되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는 제법 한글을 잘 아는 것 같아 내심 기특했는데, 자음과 모음 구별이 안 되는 게 내 생각보다 더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초심은 어디로 가고 초조해지고 하원 후 아이의 놀이터 시간을 확 줄여야겠다 생각했다. 아직도 제대로 한글을 모른다고? 그림책을 많이 본 아이는 글자를 통으로 본다던데, 이제까지 이렇게 익힌 한글을 다 안다고만 생각했다니 내 탓이다.
지금의 아이들은 그때의 우리와
많은 게 같고 많은 게 다르다
그때의 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시야가 좁아졌다. 언젠가 다 알게 될 한글,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만 알고 가자. 지금은 무조건 많이 뛸 수 있게 돕고 좋은 습관을 만드는 걸 해주자. 이러던 내 마음은 보이지 않고 ‘학습’할 것들만 보였다.
그때의 우리보다 지금의 아이들은 할 것이 참 많아졌다. 눈 돌려 보면 유치원생 친구들도 4시쯤 유치원 마치면 영어 과학 미술 등등 학원에 가기에 정신이 없다. 우리 아이도 두 개의 학원을 더 다니고 있는데, 어제의 난 한글만 생각하며 또 학원을 찾고 있었다.
뛰어 놀려고 하는 아이들의 마음은 언제나 같은데, 뛰어 노는 것 마저 여기저기 체험을 다니며 인공적인 놀이를 하는 경우가 꽤 늘어났다.
넘쳐나는 정보들 사이에 엄마가 마음을 잡지 않으면 아이들도 갈대처럼 흔들리며 여기저기 다니며 고군분투하게 된다.
남편과 아이가 살아갈 힘을 만들어 주자고 그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대화 나눴었다. 알고 있는 것을 응용하고, 잘못된 것과 잘된 것들 사이에서 중심을 찾고, 자기의 삶을 만들어가게 하자. 스스로 살아갈 힘을 만들어주자고 했었다.
세상을 배우는 자와 배우지 않는 자로 구분한다는 미국의 벤자민 바버의 말이 떠올랐다.
아이가 세상을 즐겁게 바라보며 스스로 행복한 세상을 살려면 배우는 것을 즐겨야 한다. 그런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선 불필요하게 성급한 강요를 할 필요는 없다. 아니해서는 안될 것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들의 뇌도 무언가가 학습으로 다가오고 강조되면 스트레스를 받고 오히려 퇴화한다고 한다.
“양육” 아이를 보살펴 잘 자라게 한다는 뜻. 스스로 잘 살 수 있게, 세상을 즐겁게 배우며 살아가게 하기 위해 지금의 아이를 잘 보살펴야겠다. 흔들리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