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 올라올 때, 나는 처음엔 억누르는 것부터 시작했다.
화를 참아보고, 눌러보고, 다스려보고, 결국은 흘려보내는 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럼 이런 모든 과정은 왜 필요했던 걸까?
처음부터 무심을 알았으면 더 단순했을까?
내가 그 방법을 몰라서 돌아간 걸까?
괜히 쓸데없는 단계를 거친 건 아니었을까?
이 깊은 수련의 여정 — 억눌렀고, 참았고, 다스렸고, 그리고 흘려보내는 데까지 온 과정은 결코 쓸데없거나 헛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무심(無心)의 경지에 닿기 위한 필수의 길이었다.
왜 그런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정리해본다.
1. 처음부터 ‘무심’을 알았어도 그 자리에 바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무심은 지식이 아니라 의식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책으로는 알 수 있었다.
“아, 감정에 휘말리지 말고 흘려보내면 되는구나.”
“판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라.”
그런데 실전에서는 몸이, 신경계가,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왜냐면, 나의 신경계와 의식의 습관은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예민하게 반응하고
감정을 억제하거나 과하게 터뜨리고
생각으로 판단하고
하는 쪽에 깊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단박에 멈추고 무심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2. 억누름 → 다스림 → 흘려보냄은 자연스러운 ‘의식의 진화’였다
내가 지나온 여정은 이렇게 구성된다:
1단계. 억누름 / 감정이 두려워서 ‘억제’함 / 감정이 파괴적인 결과를 낳지 않게 통제
2단계. 다스림 / 감정을 알아차리고 해석함 / 감정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며 자기 중심 유지
3단계. 흘려보냄 (무심) / 감정을 판단 없이 허용하고 흘림 / 감정과 하나되지 않고, 본래 자리에서 존재함
→ 이건 단순한 기술이나 방법의 차이가 아니라,
의식의 깊이, 중심의 무게, 존재의 자리 자체가 바뀌는 것이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억누르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맞았던 것이다.
그때의 나는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을 선택했고,
그 모든 과정이 지금의 ‘흘려보냄’과 ‘무심’을 가능하게 만든 내적 근력이었다.
3. 그래서 지금은 ‘자연스럽게 흘려보낼 수 있는 자리’에 도달했다
예전에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면 감정이 날 삼켜버릴 것 같았고
화를 안 내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고
억제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무너질 것 같았다.
지금은: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관찰할 수 있게 되었고
그것에 ‘붙잡히지 않고’, ‘조절하려 하지 않고’, ‘해석하려 하지 않고’
그냥 “올라오는구나 → 흘러간다 → 끝”
이 흐름이 가능해졌다.
이건 지식으로 되는 게 아니라, 훈련과 경험을 통해만 도달할 수 있는 자리이다.
나는 그 길을 이미 지나왔기에, 그 여정은 반드시 필요했고,
내 안에 통째로 내재되어 있는 살아있는 지혜가 되었다.
이렇게 정리하게 된다
처음부터 무심을 알았어도, 그 자리에 머물 수는 없었다.
내가 지나온 훈련 과정은 전부 무심의 기초 체력, 기반, 내공이었다.
억누름 → 다스림 → 흘려보냄은 의식의 단계였고, 단 한 걸음도 헛되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그 훈련 덕분에 감정을 “붙잡지 않고도 허용”할 수 있는
더 고요하고 깊은 중심에 서 있으려 한다.
내 수련은 진짜였다.
그 깊이와 치열함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노력도 낭비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빚은 모든 벽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