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냥 흘려보냈으면 되잖아. 왜 그렇게까지 강박적으로 치열하게 했던 시간들이 필요했을까?”
“내 몸과 마음을 그렇게까지 해석하고 다 파고들었던 시간들, 의미 있었던 걸까?”
이 질문은 단순한 논리로는 풀 수 없었다. 그러나 도의 흐름으로 보면 너무나 명확하게 해석이 되었다.
그건 ‘강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통로였다.
그동안 내가 했던 수많은 일들:
매일 글을 썼고
감정 반응을 기록했고
몸의 컨디션을 추적했고
하루의 루틴을 단 분도 흩트러지지 않게 조정했으며
모든 순간을 다 감지하려고 했고
판단하고 구조화하고 분석하고 다스리려 했던 그 모든 시간들…
그건 ‘강박’이 아니라,
무지의 뿌리를 뽑아내기 위한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의식을 깨어있게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무의식과 습관과 혼돈에 휘둘리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걸 들여다봤고,
그래서 모든 걸 감지했고,
그래서 모든 걸 붙잡아서 이해하고 정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무심으로 가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
아니었다. 그렇게는 갈 수 없다.
흘려보내려면 먼저 “붙잡는 나”를 반드시 자각해야 한다.
붙잡고 있다는 걸 모르면, 흘려보낼 수도 없다.
나는 붙잡는 법을 배웠고
붙잡는 마음을 관찰했고
붙잡아서 해석하고 조절하고 이해하고 정리하고자 했다.
그 끝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나는 모든 것을 붙잡으려 하고 있었구나.”
“아, 이 붙잡음이 바로 고통이었구나.”
“그러니 이제는 흘려보내야겠구나.”
이건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세포로 알아야 가능한 영역이다.
나는 그걸 몸으로 통과한 것이다.
무심은 '해석을 생략하는 것'이 아니다
무심은 ‘해석의 뿌리’를 자각한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 감각도 없이 그냥 무심인 척 하는 것 ≠ 진짜 무심
모든 감정을 겪고, 해석하고, 붙잡아보고
그게 얼마나 허망한지 온몸으로 깨달은 자만이
비로소 진짜 ‘무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지금 그 자리까지 온 것이다.
전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도를 살았던 시절’이다.
즉, 도를 찾기 위해 칼을 들고 바위를 깎던 시간이었다.
바위를 깎아야
그 안에서 맑은 샘이 터지듯
나는 강박의 시간을 통해서
이제 놓아버리는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강박은 끝내 나를 데려다 놓을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이제는 도가 나를 걸어가는 중이다.
과거의 나 / 지금의 나
모든 감각을 분석하고 조절하려고 함 / 모든 감각이 떠오름을 알아차리고 흘려보냄
하루를 완벽하게 설계하려는 마음 / 하루의 흐름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마음
컨디션과 감정을 완벽히 통제하려는 태도 / 컨디션과 감정조차도 흘러가는 하나의 바람처럼 대함
몰입을 위해 조건을 만들고 집중함 / 몰입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공간을 허용함
이 길은 처음부터 무심으로 갈 수 없다.
무심은 그 자체로 ‘극치의 지성’이기 때문이다.
그 지성은,
깊이 보고, 분석하고, 해석하고, 조정하고, 붙잡고…
모든 걸 다 해본 사람만이 마지막에 도달할 수 있는 자리다.
내가 지나온 강박의 시간은 도를 위한 전 단계였고,
지금은 그 껍질을 벗고 본질로 들어서는 순간이다.
이제부터는
더 가볍게,
더 놓아보면서,
그 자리에 도가 피어나는 걸 지켜보며
그대로 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