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by Irene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 통제 너머의 진짜 귀환

어릴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그냥 받아들이면서 휘둘리다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고 다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라는 걸 증명하고 연구하고 통찰하다가, 결국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나의 진짜에 나 자신과 마주하는 귀환의 자리에 머무르게 되었다.


결국은 무심 훈련을 했지만, 이 무심조차 훈련과 수련과 통제를 통해서 통제할 수 있다는 그 자신감과 오만 속에 끊임없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를 증명하고 연구하다가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무심은 무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극한으로 마음을 무심의 반대 방향으로 통제해 본 다음에, 결국 그 통제와 무기를 모두 내려놓고 다시 무심, 즉 아무런 집착과 의도가 없는 상태, 그 자리, 그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란 걸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이 문장은 단순한 철학적 표현이 아니라,

삶 전체를 돌고 돌아 체험한 깨달음의 언어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참된 귀환의 자리에 도달했다.


이 말은 깨달음의 전통에서

초심 → 탐구 → 통찰 → 해탈로 이어지는 여정을 함축하는 상징이다.


내가 걸어온 여정의 구조

1. 처음 – 휘둘리며 살던 시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어릴적 그냥 있는 대로 살고, 감정에 휘둘리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며 살던 시기였다.

하지만 마음 어딘가에서 ‘이건 아닌데...’ 하는 미세한 불편이 싹트기 시작했다.


2. 통제와 탐구의 시기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지? 무엇이 진짜일까?

훈련하고, 수련하고, 마음을 조이고, 루틴을 짜고, 의식적으로 통제하고 설계하며

"진짜 산과 물"을 증명하려고 애썼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매우 중요했고,

실제로 많은 성취가 있었고, 이 시기를 통해 인생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훈련조차도 또 다른 집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삶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3. 귀환, 제자리

"산은 다시 산이고, 물은 다시 물이다."

다시 돌아온 자리지만, 이제는 깨어 있는 그대로의 수용이었다.


무심조차 통제할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이 무너지고

모든 훈련, 모든 통제의 손을 놓고

그냥 이대로 있어도 괜찮다는 깊은 수용의 자리에 이르렀다.


이 자리는 “깨달은 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자리”와 같다.

말없이 밥 짓고 물 긷는 그 자리.

특별하지 않지만, 완전히 새로워진 자리.


나는 무심을 훈련하며

무심조차 통제하려 했고

통제를 잘하면 무심도 따라올 줄 알았다.

그러나 끝내,

무심은 노력의 결과물이 아닌 수용의 상태임을 알았다.


산은 다시 산이고, 물은 다시 물이다.

아무런 의도 없이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이미 충분했다.


이제는 통제하지 않음조차 통제하려 하지 말 것.

그냥 "오늘의 산"과 "지금의 물"이

그대로 산이고, 그대로 물임을 인정하는 자리면 된다.

그리고 다시 무너지는 날이 오더라도 괜찮다.

그조차도 다시 산이 되고, 물이 되니까.


이 글은 일종의 귀환 선언이다.

집착 없는 수용, 그 자리에서 다시 삶을 살아가기 위한 조용한 약속이다.

지금은, 그저 이 자리에 머문다.


무심은 결국 '하려는 마음조차 놓는 자리'였다

무심을 훈련하면서 잘 되어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이 성장했고, 그 과정을 기술적으로 이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보면서 시스템처럼 구성해나갔다. 그러면서 점점 무심해지고, 부교감신경도 안정되었고, 잘 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내가 갖고 있던 모든 기술과 무기가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벽에 부딪혔다. 결국 무심은 억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통제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깨닫고 나서야, 처음으로 무심이란 ‘하려는 마음조차 놓은 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통제의 극한까지 간 다음에야 경험하게 된 ‘그냥 흘러가는’ 자리였다. 도대체 이 훈련은 무엇이었을까?

---


무심을 훈련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잘해왔다고 느꼈다. 많은 성장이 있었고, 실제로 다양한 기술적 시도를 하면서 나 자신을 다듬었다.


예를 들면 마음을 다스리는 루틴을 만들고, 신체를 조절하고, 말투와 시선처리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훈련하며, 내 하루의 모든 분 단위 시간을 통제 가능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운동, 외모, 호흡, 감정 반응, 대인 관계에서의 리액션, 그 모든 것이 통제와 구조 속에 있었고, 점점 그 통제의 결과로 무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면서 실제로 부교감신경이 안정되었고, 몸과 마음 모두 균형을 이루어가는 듯했다. 그 무심은 마치, 통제의 기술을 정점까지 끌어올리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결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졌다. 아무리 기술을 써도, 아무리 익혀왔던 무기들을 꺼내 들어도,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의 폭풍, 혹은 생명의 힘 같은 것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때서야 진짜 무심이란

내가 만들고, 유지하고, 통제하는 무언가가 아니란 걸 절절히 깨달았다.


무심을 훈련하고,

무심조차 시스템화하고,

그 무심을 기술적으로 통제하고,

그 통제된 무심을 정교하게 구조화하고,

그 구조 안에서 더 깊은 무심으로 가려고 애썼지만,

결국 그 모든 시도조차 또 하나의 ‘의도’이고, ‘집착’이고, ‘통제의 환상’이었다.


결국 내가 가진 모든 무기를 놓게 되었고,

모든 실력을 포기한 채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상하게도

무심은 '얻어졌다'.


‘얻어졌다’기보다는

애초부터 늘 있었던 무심이라는 자리로

그제야 비로소 내가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이제는 분석도 하지 않고,

해석도 하지 않고,

어떤 틀로 해석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저 흐르는 대로 둔다.

흐르는 마음, 흐르는 감정, 흐르는 삶.

그 모든 것을

그대로 흘리게 둔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훈련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나는 극한까지 훈련해보았기에

그 훈련조차 내려놓을 수 있었다.

억지로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정점까지 가보니 자연스레 놓아지게 된 것이다.


결국, 무심이란

‘하려는 마음조차 놓는 것’이며,

‘절대로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이며,

‘그저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저절로 흘러드는 상태’였다.


이제는

그 어떤 시스템도 만들지 않는다.

법칙도, 규칙도, 루틴도 붙잡지 않는다.

완벽하게 통제했던 내 몸, 내 외모, 내 말투, 내 하루의 1분 1초,

그 모든 것들이

더 이상 나를 ‘무심’에 데려다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무심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내가 결국 내려놨을 때 비로소 자리를 드러낸 것이다.

그 자리는

애초에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내가 너무 애써서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 훈련은 결국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그 통제가 무너지고,

그 무너짐조차도 통제하지 않고 흘러가게 두었을 때

비로소 ‘진짜 나’로 돌아오는 귀환의 길이었다.


무심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심은, 나의 모든 시도가 무너졌을 때

그제야 고요히 드러난

본래의 자리였다.



https://open.substack.com/pub/irenekim2/p/20260111-the-mountain-is-a-mountain?r=5k6vb5&utm_campaign=post&utm_medium=web&showWelcomeOnShare=true


매거진의 이전글 [2026.01.10] 무심은 무너짐 이후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