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20]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에서

by Ir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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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삶이 꼭 물결 같다고 느껴진다.

가늠할 수 없는 바깥의 움직임에 따라 안쪽이 흔들리고,

내가 만드는 결정인 줄 알았던 것들이

사실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 쌓여 있던 흐름의 결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건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을 천천히 기억해내는 일이 아닐까.

이 길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걸을수록 내가 누구였는지를 되찾아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삶이란 종종, 목적지보다 방향이 먼저인 여정이다.

도착을 말하기엔 이 길은 너무도 고요하고,

성취를 말하기엔 이 마음은 아직도 무언가를 잃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어떤 길은 ‘맞다’.

이해되지 않아도, 설명할 수 없어도,

몸과 마음이 동시에 조용해지는 길이 있다.

그곳에선 견디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지는 길.

애써 꾸미지 않아도, 무언가 되어 보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로 돌아오는 길.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색을 갖고 태어난다.

그 색은 처음엔 너무 연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동안 조금씩 진해진다.

기억, 상처, 기쁨, 기다림, 오해, 사랑...

그 모든 것들이 천천히 색을 덧입히고 나면

어느 날 거울 속에 낯선 내가 서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묻는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였던가’라고.


삶은 때때로 나를 멀리 데려다 놓는다.

남의 꿈을 좇게 하고, 남의 언어를 말하게 하고,

남의 방식으로 슬퍼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낯선 시간들을 지나오고 나면,

사람은 다시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걷기 시작한다.

그 목소리는 작지만 단단하고,

그 속에는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살고 싶은 방식’이 담겨 있다.


나는 언젠가부터

더 이상 이유를 따지지 않게 되었다.

‘왜 이 길을 걷는가’보다는

‘이 길 위의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표정이 편안하고, 걸음이 자연스러우며,

침묵이 나를 채우는 시간이라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어쩌면 인생의 법칙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빨리 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길을 정확히 가는 것도 아닌,

다만 내 마음이 머물고 싶은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 있는가를 묻는 일.


그리고 결국, 그 자리가 나였다 말할 수 있다면

그 삶은 이미 충분한 것이다.


말하자면,

인생은 어느 날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과정이다.

그리운 이름도 없이, 대단한 신념도 없이,

다만 걸을수록 익숙해지는 길.

내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점점 또렷해지는 여정.


나는 이제, 그 길 위에 서 있다.

더는 무엇을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내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삶은

이미 나를 향해 충분히 움직였다고

조용히 믿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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