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 첫 만남
그날은 이상하리만치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평소 같았으면 흘려보냈을 일에도 신경이 곤두섰고, 익숙한 일상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할퀴듯 아파오고, 내 안의 감정은 이유도 모른 채 소란스러웠다. 쓸데없는 분노와 슬픔이 뒤엉켜 가슴을 쿡쿡 찔러댔다. 그럴수록 나는 더 잘 알았다. 지금 필요한 건 해답이 아니라 땀이라는 걸. 내 안에 엉켜 있는 감정을 분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몸을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짐을 챙겨, 늘 그랬듯 익숙한 헬스장으로 향했다. 말없이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 내 얼굴은 무표정했고, 눈동자에는 고요한 분노가 맴돌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 고요한 분노는 곧 풀릴 것이다. 몸을 던지듯 몰입의 상태로 들어가 땀으로 감정을 밀어낼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렇게 덤벨을 쥐고 운동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거울 뒤편, 입구 쪽으로 스치는 그림자가 시야를 툭 건드렸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분명 낯선 얼굴인데, 묘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마치 예전에 꿈속에서 한 번쯤 본 적 있는 얼굴처럼. 어딘가 잊고 있던 감각을 자극하는 그 낯섦이, 나도 모르게 그의 존재에 시선을 고정하게 만들었다. 무언가가 끌렸다. 이끌림이라는 단어조차 부족할 만큼.
그는 내 이상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본래 노출이 많은 운동복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반바지에 망고 나시, 보기엔 다소 과한 차림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흐트러졌다. 평소 같았으면 고개를 돌렸을 텐데, 시선이 자꾸만 붙잡혔다. 그의 팔을 타고 흐르는 근육의 선, 넓은 어깨, 그 안에 숨어 있는 절제된 힘이 보였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생각하던 기준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는 8년 넘게 운동을 해왔다. 수많은 몸을 보았고, 수많은 태도를 마주했다. 절제된 근육, 고른 밸런스, 인체의 조화—내가 추구하는 미는 확고했다. 그런데 그 남자를 보는 순간, 그동안 머릿속에 흐릿하게 그려졌던 모든 이미지들이, 마치 오래도록 조각나 있던 퍼즐이 하나로 맞춰지듯 눈앞에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상이라는 개념이 현실 속 인물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 내가 꿈꾸던 사람은 이런 모습이었구나.’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동시에 조금 두려워졌다. 이런 사람을 이렇게 갑자기 마주쳐도 되는 걸까.
내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이상형은 결국 이 사람을 향해 다가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걸음걸이, 무심한 듯 정확한 눈빛,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존재감. 머리카락이 살짝 이마를 가리며 떨어질 때조차, 그의 움직임은 우아하고도 단단했다. 나도 모르게, 나는 그를 기준으로 내 기준을 다시 세우고 있었다.
더 놀라웠던 건, 그가 나를 닮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늘 내 피부가 너무 하얗다고 생각했었다. 살면서 나보다 더 하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그는, 남자인데도 나처럼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성적인 분위기는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부드러움과 강인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순된 아름다움. 나는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꼈다. 마치 이질적인 두 세계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는 듯한 매혹.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처럼 보였다.
그의 몸은 절제 그 자체였다. 중량에 의존하지 않고, 근육 하나하나를 느끼며 정성스럽게 움직이는 동작들. 과하지 않은 무게, 정제된 호흡, 정확한 자세—모든 것이 그의 몸에 배어 있는 철학 같았다. 그는 단순히 근육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몸이라는 존재를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런 방식으로 운동을 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를 보면서 나조차 내 몸의 숨결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의 걸음걸이도 마찬가지였다. 흐트러짐 없이, 조급하지도 않고, 마치 세상의 리듬에 지배받지 않는 사람처럼 자신만의 속도로 걸었다. 그런 걸음에서는 단순한 여유가 아니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느껴졌다.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침착함. 나는 그 속에서 말없는 단단함을 느꼈다. 말없이도 깊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움직임 하나로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최대한 시선을 거두려 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한 얼굴을 유지했다. 하지만 내 안은 요동치고 있었다. 가슴 깊숙한 곳이 조용히 울리기 시작했고, 그 울림은 점점 커졌다. 나도 그도,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할 때마다, 내 안의 감각이 다시 살아났다. 그건 단순한 호기심이나 외모에 대한 반응이 아니었다. 서로를 알아보는 감각,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지낸 감정을 다시 떠올리게 만드는 어떤 울림이었다. 그 울림은 마치 오래된 책갈피 사이에 끼워둔 편지를 우연히 다시 발견한 것 같은 아련함이었다.
헬창은 헬창을 알아본다. 같은 리듬, 같은 집중, 같은 철학을 가진 사람은 말없이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말 한마디 없이도 서로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깊은 울림을 전할 수 있는지,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건 연애의 시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떤 존재를 향한 경외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붙잡아야 했다. 이곳은 나에게 성역이었다. 감정에 휩쓸려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한 번 감정이 개입되면 이곳은 더 이상 평온한 쉼터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년간 어떤 교류도 만들지 않았다. 이 공간만큼은 나의 것이어야 했다.
‘이러면 안 돼…’ 흔들리는 가슴을 다잡았다. 숨을 들이쉬고, 데드리프트 중량을 평소보다 높였다. 세트 수도 늘려, 육체의 고통으로 감정의 파고를 덮으려 했다. 그렇게 나를 다잡는 중이었다. 땀과 고통 속에서 나를 잊고자 했다. 하지만 감정은 땀으로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내 옆에 여전히 있었다.
그리고, 그가 다가왔다. 내 바로 옆, 손을 뻗으면 닿을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심장이 갑작스레 철렁 내려앉았다가, 금세 다시 빠르게 고동쳤다. 지금 이 헬스장에 그와 나, 둘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큰 파문을 일으켰다. 침묵이 공기를 밀어냈고, 시간의 흐름마저 둔화시켰다.
나는 평온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눈빛을 흩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이미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천천히, 아주 조용히… 그를 향해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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