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늘 무언가를 선택하라고 재촉한다.

by Ir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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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늘 무언가를 선택하라고 재촉한다.

놓치기 전에 잡으라고, 기회는 한순간이라고, 손에 쥐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지만 모든 선택이 삶을 진동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

모든 만남이 인연이 될 필요도 없고, 모든 길이 발을 디뎌야 할 곳도 아니다.


때로는 선택하지 않는 태도가 더 명확한 방향이 되기도 한다.

가만히 머물러 있음으로써 오는 것과 떠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

고요는 외면이 아니라 본질을 향한 집중이고, 절제는 억제가 아니라 본능을 정제하는 일이다.


어떤 삶은 본질이 요구하는 침묵 속에서 형성된다.

말을 줄인다는 건 언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 사이의 결을 스스로 식별해나가는 일이다.

어떤 감정은 언어로 옮기는 순간 무너지고,

어떤 진실은 침묵 속에서만 제 빛을 발한다.


수많은 유혹과 가능성은 언제나 열린 문처럼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진짜로 와야 할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인연이다.

기회는 잡히기를 기다리지만, 인연은 맞춰지기를 기다린다.

그 차이를 아는 순간, 선택은 기술이 아니라 안목이 된다.

많은 것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하나를 위해 나머지 모두를 놓아주는 결심이 된다.


비어 있는 손이 초라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 가장 충만한 존재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에서 시작된다.

그 손은 서둘러 움켜쥐지 않고,

당겨지지 않은 시간 속에서 천천히 피어오르는 진실을 기다린다.


어떤 기다림은 고통이 아니라 감식이다.

무엇이 스쳐 지나가는지, 무엇이 머물 자격이 있는지,

그 미세한 떨림을 알아차릴 수 있는 고요한 감각.

그 감각은 혼자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정교해지고,

소음이 줄어들수록 더 깊어진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손길이 따뜻한 것은 아니며,

모든 다가옴이 반가운 것도 아니다.

때론 스쳐야 할 인연이 머무르고,

머물러야 할 인연은 쉽게 지나간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일은 곧 분별의 일이고,

분별은 단호함보다도 오히려 깊은 애정에서 출발한다.


애써 애쓰지 않기로 한 삶에는,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

기다려도 된다는 확신,

비어 있어도 괜찮다는 위안.

그 위안은 누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긴 침묵 속에서 자신에게서 서서히 흘러나온다.


살아가는 일은 방향을 정하는 일에 가깝다.

속도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

많은 것을 겪었다는 말보다,

하나를 깊이 들여다봤다는 고백이 더 진실하다.

그 고백은 언제나 조용하다.

단단하지만 유연하고,

단정하지만 닫히지 않은,

열림과 기다림이 공존하는 자리에서 태어난다.


그러니 이 삶은 역행이 아니다.

모든 것을 가진 자의 내밀한 선택이며,

이미 충분한 존재가 불필요한 것들을 거절하는 침묵이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진짜가 도착할 자리 하나는 점점 더 또렷해진다.


가끔은 질문이 온다.

정말 이 길이 맞는 걸까.

이대로 살다 보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건 아닐까.

그럴 때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다.

다만 흔들리지 않는 감각,

가장 깊은 자리에서 들려오는 미세한 떨림 하나.

그것이면 된다.


오직 진짜 하나를 위해

무수한 가짜를 받아들이지 않는 길.

그 길은 고통의 견딤이 아니라,

정제된 방향감각이다.

그 감각은 선택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다듬는 일이다.


끝까지 남는 것은 결국

가장 조용한 것들이다.

흔들리지 않고,

번지지 않고,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것.


삶도,

사랑도,

기다림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https://medium.com/@irenekim1b/what-remains-in-the-silence-ba9d71dd97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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