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지니어의 서평] <내일,내가 다시 좋아지고 싶어>

황유나 지음, 리드리드출판 출판

by 채유

어렸을 때부터 언(言)보다는 문(文)에 강했다. 나는 글쓰기에 대해 자신 있었고, 직장인이라면 한 번쯤 거쳐가는 자소서 작성 과정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도리어 글자수에 맞춰 분량을 줄이기 위해 100번을 훌쩍 넘게 읽고, 퇴고하고, 다시 뒤돌아서 수정하는 과정이(그리고 완벽주의가) 고난이었을 뿐. 대학생 시절 무수한 아르바이트 종류 중에 일부러 학원 강사를 지원하고, 조별 과제 역할 분담에서 조장 아니면 발표를 도맡아 스피치 스킬을 기르기 위해 노력한 것과는 상반되는 태도였다.


그렇기에 20대 후반, 흘러가는 생각들을 글로 모아보자고 마음먹고, 연재 플랫폼에 이 에세이를 업로드하자는 다짐과, 브런치 작가를 신청하기까지 물 흐르듯 생각과 행동이 이어졌다. 그리고 작가 신청이 한 번에 통과될 때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한 편 정도는 뚝딱뚝딱 글이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글로 쓰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그냥 잘 맞는 친구와 수다 떨 때 나오는 느낌으로, 요즘의 생각이나 고민을 그저 활자로 정리하는 수준으로 쓰려는 것뿐이었는데, 그 가벼운 시도가 어려웠다. 심지어 문장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일상'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공감을 얻기엔 얕으면서 속내를 꺼내기엔 깊은지, 창작의 고통을 맛보기 하며 꺾여버린 포부였다.


그런 맥락에서 책 '내일, 내가 다시 좋아지고 싶어'를 읽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19가지 에피소드로 엮어낸 작가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학생운동 관련 에피소드가 있는 것으로 봐서, 작가는 40대 후반 이후의 나이대인 것 같다고 추측했다. 하지만 책은 현재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10대 말부터 직장 생활을 경험한 이라면 노년의 누군가까지 모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다. 아마도 대충 돈 많은 집안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사람 범주에 속해 있다면 이 책은 어둡고 우울하며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중산층 절반이 하위층이라고 생각하는 대한민국에서는 그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사실 첫 챕터부터 크리스마스에 자살 사건을 두 눈으로 목도한 장면으로 시작하기에, 어떤 이에게는 지뢰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즘 에세이는 따듯하고 포근한 말로 위로하고 다독이는 현실회피형 내용이 많은데, 이 책은 오히려 뉴스 기사에나 볼 법한 이야기가 몽땅 담겨있기 때문이다. 자살 목격뿐 아니라 자살 시도를 비롯해, 부정적 의미의 K-중소기업, 성폭행 그리고 법적공방, 미숙한 가정환경, 착한 아이 증후군, 성인 ADHD, 완벽주의와 직장에서의 희생, 경력 단절의 두려움 등의 키워드를 꼽아볼 수 있겠다. 그러기에 '아픔과 상처에 보내는 공감과 위로'라는 책 뒤표지의 문장을 보고 페이지를 펼친 사람이라면 피곤하고 암담한 현실을 겪은 남의 인생을 들여다봐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만, 결국 작가는 앞에서 나열한 고난과 실패를 딛고 오늘을 살고 있기에, 에피소드 속 심경 속에서 강직함을 느낄 수 있다. 드라마나 현대판타지가 아니므로, 작가에게 고통스러운 경험으로 기억되는 인물이나 사건에 엄청난 반전이나 복수극이 펼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제보다 성장한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며 변화하는 세상에서 용기내고, 타인을 이해하며, 상처가 무뎌지길 기다리며 인내하는 모습이 또 다른 공감대를 형성한다. 완벽한 타인이어도 어떠한 종류의 어려움을 겪었든지 그 순간에 매몰되지 않고 벗어나서 오늘을 버티고 내일을 바라보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인생은 셀프 구원. 이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이다. 결국 시간은 흐르고, 오늘의 문제는 어제의 문제가 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과거의 것은 퇴색하고, 나쁜 것만 곱씹고 있기엔 현재의 삶도 빠듯하다. 예측 불가의 미래를 위해 마음의 여유를 남겨두려면 지금을 정리해야겠다. 내 인생에서 나를 위해 나만 할 수 있는 일, 홀로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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