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엄마 마음을 잘 이해해 주기 때문에 꼭 있어야 된다고 한다. 그렇다고 딸이 항상 다정다감하고 이해를 잘해 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 집 딸들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거의 아빠 편이다. 서운해서 물어봤더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왠지 아빠 편을 들어주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친밀감 검사를 했는데 의외로 아빠가 훨씬 높게 나와서 깜짝 놀랐었다.
아들만 있는 사람들은 딸이 둘이라서 좋겠다고 하는데 솔직하게 뭐가 좋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단지 확실한 것은 딸이 하나가 아니고 둘이어서 좋다.
큰 딸과 소통이 되지 않아 못 마땅할 때는 작은 딸이, 작은 딸과 문제가 생기면 큰 딸이 위안이 되어 준다.
어릴 때는 엄마만 바라보더니 컸다고 관심 밖으로 밀어내기 일쑤다. 당연하고 바람직한 현상으로 이해는 되지만 그래도 섭섭할 때가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옛날이야기만 한다는 말이 듣기 싫어서 최대한 자제하려고 노력하지만 과한 조언으로 관계가 서먹해지기도 한다. 엄마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표시로 가끔은 기분 나쁘다표시로 삐친척해 보기도 한다. 남편은 어른 답지 못한 초딩수준이라며 유치하다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은근히 부러워할 때도 있다. 쿨하고 이해 잘하는척, 괜찮은 척하는 것보다는 딸과 티격태격 유치해도 솔직하게 표현하며 살고 싶다.
작은 딸이 한동안 해외에 체류하게 되었다. 딸은 떠나면서 자기가 없어도 엄마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을 했다. 딸은 엄마를, 엄마는 딸이 잘 지내기를 바랐다.
시차는 있어도 바쁜 중에 그런대로 카톡과 페이스 톡으로 안부를 주고받으며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연락이 뜸해진다. 바쁘기도 하지만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엄마의 문제 해결 방식이 싫다고 했다. 도움도 안되고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짜증나고 더 답답해진다고 투덜거렸다. 안해도 되는 경험을 굳이 하면서 사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한 충고가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 같다. 하기는 어떤 답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냥 들어 달라고 하는 말인데 나도 모르게 꼰대짓을 했다. 그런 마음을 이해는 하지만 카톡조차 보내지도 않고 기껏 보내면 이모티콘 하나로 끝이다. 행여나 신경 쓰일까 봐 보고 싶은 마음과 궁금증을 꾹 눌러 참았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고 망설이다 어떻게 지내는지 전화를 했는데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며 심드렁하게 받는다. 반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너는 엄마, 아빠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지도 않니?”라고 톡 쏘며 화를 내고 말았다. 오랜만에 하는 전화인데 반기기는커녕 기껏 한다는 소리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니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전화를 한다는 말인지 섭섭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미안하다는 말 대신 엄마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쌓인다는 대답이다. 못된 것 같은 이라고. 이제 전화 안 하리라 생각하며 냉전이 시작됐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남편이 애랑 똑같다며 혀를 끌끌 찬다. 더 얄밉다.
스마트 폰을 들었다 놓았다하며 열흘이 지났다. 카톡도 없다. 큰 딸 같으면 화가 났어도 몇 시간만 지나면 “엄마?”하면서 전화를 하는데 작은 딸은 안 그런다. 답답한 내가 해야 한다. 그래도 이번에는 절대 내가 먼저 안 해야지. 엄마가 얼마나 화났는지 보여 줄 것이다. 하나도 안 궁금하고 보고 싶지도 않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큰 딸에게 동생과 연락이 있었는지 은근히 물어본다.
그런데 드디어 전화가 왔다. 아빠 폰이 아니고 내 폰이다. 웬일?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가 다행히 밝다. 그동안 삐쳐 있었다는 것을 깜박 잊고 말았다. 섭섭했던 감정은 흔적도 없이 눈 녹듯 다 녹아 없어지고 그냥 반갑기만 하다.
그동안 매우 바빴고 아파서 병원에 다녀오는 길인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보살펴 줄 사람도 없는 곳에서 혼자 아팠을 딸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저려 온다. 위안이 되어 주지는 못하고 괜한 심통을 부리며 아이를 더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가 삐쳤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화 속 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하기 정신없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통화는 계속됐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니 새벽 세시가 다 되어 간다. 눈꺼풀이 눈을 덮는다. 그래도 전화를 끊고 싶지 않다.
“엄마는 너와 수다 떠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하단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그리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