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존재를 증명한다. 기억이 사라져도
봉준호 감독은 언제나 장르를 넘나들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감독입니다. 그는 살인의 추억에서 사회 시스템의 부조리를 파헤쳤고, 괴물에서는 블록버스터 속에서도 날카로운 풍자를 담아냈습니다. 설국열차에서는 계급 투쟁을, 옥자에서는 자본주의의 탐욕을, 그리고 기생충에서는 사회적 불평등을 이야기하며 전 세계적인 공감과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SF라는 장르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과 사회, 그리고 우리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미키 17은 인간의 우주 개척에 대한 이야기라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영화는 인간 복제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주인공 미키는 죽을 때마다 다시 태어나고, 시스템은 그를 대체 가능한 존재로 취급합니다. 그에게 정체성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났을 때, 그는 여전히 같은 존재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개체일까요.
이 영화는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Mickey7을 원작으로 하며, SF 장르의 무한한 상상력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합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이 이야기하는 방식은 여전히 깊고 따뜻합니다.
복제 인간의 딜레마를 넘어, 영화는 한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리고 그 답은 단순한 과학이나 철학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감정에서 찾아갑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통해 우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미키 17 은 이 질문을 품고,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SF라는 장르 속에서도 봉준호 감독 특유의 날카로움과 따뜻함이 살아 있으며, 영화는 먼 미래 사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2054년, 인류는 더 이상 지구에 머물 수 없게 되고, 얼음으로 뒤덮인 혹독한 환경의 행성 니플하임으로 개척을 시작합니다. 이곳에서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거대한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미키 반스는 ‘익스펜더블(Expendable)’, 즉 소모품으로 여겨지는 존재입니다. 그는 극한의 환경에서 가장 위험한 작업을 담당하며, 임무 중 사망하면 기억과 경험을 저장한 채 새로운 육체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의 존재는 일종의 대체 가능한 장비와도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열 여섯 번 죽었고, 열 일곱 번째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원래대로라면 이전의 미키는 완전히 소멸되었어야 하지만, 미키 17은 여전히 살아 있는 상태로 시스템은 이미 새로운 미키를 만들어버립니다. 원칙적으로는 단 하나의 미키만 존재해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두 명의 미키가 공존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한편, 니플하임의 환경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인간과 원주민 사이의 갈등 또한 격화됩니다. 인간들은 이 행성을 정복하려 하지만, 원주민들은 이에 맞서며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고자 합니다. 미키는 자신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 낯선 세계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더 큰 문제와도 마주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미키는 자신이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싸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의 끝에서 그가 마주하게 될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철학적, 과학적, 그리고 심리학적으로도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미키 17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끝없는 논의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정의할까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과 ‘경험’에서 찾습니다. 나의 과거, 나의 선택, 그리고 나의 감정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미키 17의 설정에서는 이러한 개념이 흔들리게 됩니다. 만약 나와 똑같은 기억과 경험을 가진 존재가 새롭게 태어난다면, 그는 나일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존재일까요.
영화 속 미키는 ‘익스펜더블’입니다. 그는 죽고 나면, 그의 기억과 인격이 그대로 복제된 새로운 신체에 다시 로딩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술적으로 완벽한 복제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했을 때, 우리는 그것을 동일한 존재로 봐야 할까요.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히 주지 않습니다. 만약 기억이 나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요소라면, 미키 17과 미키 18은 동일한 존재여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도 그들은 서로 다른 개체로 느껴집니다. 이는 우리가 ‘자아’를 단순히 기억의 총합으로만 정의할 수 없음을 시사합니다.
자아는 기억뿐만 아니라,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주관적 경험’까지 포함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미키 17과 미키 18은 같은 존재이면서도 다른 존재라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간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면서 종의 생존을 도모해 왔습니다. 우리는 후손을 남기지만, 후손은 결코 우리와 완전히 똑같지 않습니다.
유전자의 일부만을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키 17에서의 복제는 완벽한 동일성을 전제로 합니다. 새로운 미키는 완벽한 동일한 기억과 경험을 가지지만, 그는 ‘후손’이 아니라 ‘대체품’입니다.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자연에서의 유전적 변이는 개체의 독립성을 보장하지만, 완벽한 복제는 개체의 독립성을 희생하는 방식입니다. 영화 속에서 미키가 복제될 때마다 ‘이전의 미키’는 폐기되어야 하는데, 이는 개체의 지속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입니다.
즉, 이 시스템에서는 개인의 삶이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업데이트된 사본’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생명의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체성을 논할 때 중요한 개념은 ‘연속성’입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세포를 잃고 새롭게 생성합니다. 우리의 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라고 느낍니다. 그렇다면 이 ‘연속성’은 무엇에서 비롯될까요.
뇌과학자들은 인간의 의식이 단순한 기억의 총합이 아니라, 특정한 패턴으로 작동하는 신경 네트워크에 의해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만약 신경 네트워크의 패턴을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원본과 동일한 존재가 될까요. 여기서 우리는 철학적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존 록은 개인의 정체성이 ‘기억의 연속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흄 같은 철학자는 기억과 경험의 연속성이 결국 착각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자아란 사실상 여러 가지 감각과 경험이 순간적으로 조합된 일종의 ‘환상’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미키 17은 이러한 흄의 철학적 관점을 실험하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미키 17과 미키 18이 서로를 의심하고, 스스로를 ‘진짜’라고 주장하는 모습 속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의 정체성이란 우리가 누구인가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미키 17이든 미키 18이든, 그들은 스스로가 ‘나’라고 생각하는 한 ‘나’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시스템은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진짜 나’를 규정해야 할까요? 우리는 단순히 기억의 총합일까요, 아니면 특정한 순간을 살아가는 유일무이한 존재일까요? 이 질문은 미키 17이 끝난 후에도 우리의 머릿속에 깊이 남아, 끝없는 사유를 유도합니다.
미키는 ‘익스펜더블(Expendable)’, 즉 ‘소모 가능한 인간’으로 규정됩니다. 그는 개척 행성 니플하임에서 가장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존재이며, 죽더라도 새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그의 운명입니다.
그의 죽음은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과정이며, 시스템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다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새로운 미키가 태어나면 기존의 미키는 더 이상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즉, 그는 시스템 속에서 한낱 ‘대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됩니다.
이 설정은 SF적인 장치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도 닮아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소모품처럼 취급되곤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노동 생산성과 경제적 효율성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며,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시스템이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 그 사람의 가치는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업들은 끊임없이 인력을 정리하고, 자동화된 기계와 인공지능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면서 사람들의 가치는 점점 더 하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점차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라고 느끼며, 소외감과 무력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날 기업과 조직은 노동자를 하나의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짙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수치화할 수 있는 노동력이 아닙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습니다. 영화 속에서 미키가 가장 큰 고통을 느끼는 순간은 자신의 육체가 복제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은, 시스템이 그를 ‘필요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순간입니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는 감정과도 유사합니다. 직장에서 해고당했을 때,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때, 혹은 더 이상 특정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리는 스스로가 가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키 17은 이러한 사고방식에 도전장을 던집니다. 인간의 가치는 자본주의적 필요성과 생산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결국 미키 17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존재인가? 우리의 가치는 성과나 생산성에 의해 결정되는가, 아니면 존재 자체에서 비롯되는가?
이 영화는 이를 철학적 논의로 남기지 않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를 통해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적 문제들을 SF적 설정 속에서 극적으로 풀어냅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치는 그 어떤 시스템도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진짜 나’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낯선 환경을 개척하고, 미지의 세계에서 새로운 터전을 만들려는 열망은 인간의 본능과도 같습니다. 미키 17 속 인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를 떠나 얼음으로 덮인 행성 니플하임에 도착한 그들은 이곳을 ‘새로운 희망’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희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갈등이 함께합니다. 개척의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으로 기존의 것들과 충돌하게 되며, 그 충돌 속에서 우리는 늘 같은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봉준호 감독은 니플하임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원주민 간의 대립을 SF적 설정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되어 온 ‘정복과 갈등의 서사’로 그려냅니다. 인류는 언제나 새로운 땅을 발견할 때마다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그 어디에서든 같은 방식이 반복되었습니다.
이미 존재하던 생명체들은 밀려났고, 생태계는 파괴되었으며, 원주민들은 억압받았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패턴이 우주 개척이라는 미래에서도 변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묻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과거의 방식이 아니라, 다른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경쟁과 정복만이 생존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과거 역사에서 힘의 논리를 앞세운 정복은 대부분 격렬한 반발과 저항을 초래했습니다. 반면, 협력과 공존의 방식을 선택했을 때, 우리는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자연과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연을 정복하려 했습니다.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켰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항상 옳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후 변화 문제를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는 자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고, 무분별한 개발을 해왔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이 되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니플하임의 환경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태도는, 어쩌면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지구에서 저지르고 있는 실수를 다시금 반복하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남는 것은 생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방식으로 나아갈 것인가.
영화는 우리가 기존의 논리에서 벗어나 협력과 공존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미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더 이상 정복과 지배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을 고민해야 합니다.
미키 17이 던지는 질문은 새롭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방식대로 경쟁과 갈등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사회에서 공존과 협력을 모색할 것인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기에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을 것인지를요.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지만, 선택할 기회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태도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것인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독창적인 연출이 빛을 발해왔습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부여받은 캐릭터를 넘어, 마치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존재처럼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미키 17에서도 이러한 특징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 영화는 인간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그렇기에 배우들의 연기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넘어, 미묘한 차이를 통해 인물의 내면을 더욱 깊이 있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연출은 이러한 감정을 더욱 극대화하며, 관객들에게 그들의 고뇌와 갈등을 생생히 전달합니다.
영화의 중심에는 미키를 연기한 로버트 패틴슨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테넷과 더 배트맨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깊이 있는 연기력을 입증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미키 17에서 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연기 세계를 확장해 나갑니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한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복제되는 미키를 연기해야 했습니다. 같은 기억을 가진 존재지만, 매 순간 조금씩 달라지는 심리적 변화를 표현해야 하는 어려운 역할이었죠.
패틴슨은 이러한 차이를 미세한 디테일로 표현해냅니다. 초반부의 미키는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자신이 복제된다는 사실을 크게 개의치 않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는 점점 불안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시스템 속에서 소모품으로 취급되고 있으며,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의 내면은 무너져 갑니다. 패틴슨은 대사보다는 미묘한 표정 변화, 걸음걸이, 몸짓 등을 통해 점진적인 감정의 변화를 쌓아갑니다.
특히, 미키 17과 미키 18이 서로 마주하는 장면에서 그의 연기는 단연 압권입니다.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고 있음에도, 그는 목소리 톤의 차이, 눈빛의 흔들림, 호흡의 간격까지 세심하게 조절하며 두 개의 미키가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마치 한 몸 안에서 두 개의 자아가 갈라지는 듯한 느낌을 주며, 정체성의 혼란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그려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복제 인간’이라는 개념을 넘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하게 됩니다.
연출적 측면에서 봉준호 감독은 언제나 장르적 요소를 활용하면서도, 그 안에 인간의 본질을 담아내는 데 탁월한 감각을 보여주는 감독입니다.
그가 이번 영화에서 가장 주목한 연출 방식 중 하나는 바로 미장센의 활용입니다. 니플하임이라는 얼음 행성은 ‘살기 어려운 곳’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은 미키가 처한 심리적 상태를 반영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넓고 황량한 설원은 미키가 느끼는 고립감과 정체성의 불안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미키가 시스템에 의해 소모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얼음으로 덮인 차갑고 거대한 대지는 마치 미키가 맞닥뜨린 냉혹한 현실과도 같습니다. 그는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너무나 작은 존재로 남아 있으며,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진정으로 기억해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카메라 워크 역시 세밀하게 계산되어 있습니다. 미키가 혼자 있을 때, 카메라는 넓은 공간 속에서 그를 작고 미미한 존재로 보이게 만듭니다. 반면, 나샤와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카메라가 보다 친밀한 구도로 변화하며, 미키가 복제 인간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 봉준호 감독은 한 인간이 소외되는 순간과, 관계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순간을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리듬감 있는 편집도 인상적입니다. 영화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장면이 많지만,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는 유머와 긴장감을 적절히 배치하여 무거운 주제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방식을 택합니다. 미키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유머가 스며들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집 방식은 설국열차나 기생충에서도 보여졌던 봉준호 감독의 장기이며, 미키 17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합니다.
니플하임이라는 광활한 공간 속에서 한 인간이 느끼는 고독과 불안을,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희망을 미키 17은 탁월하게 담아냅니다. 이 영화는 미래를 상상하는 SF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와 인간의 내면을 가장 깊이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전히 인간다운 감정을 가진 미키가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에게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가, 그리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러나 이 영화가 전하는 가장 본질적인 메시지는 결코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미키는 끝없이 복제되며 죽음을 반복합니다. 기억은 이어지고 신체는 새로워지지만, 그는 점점 더 자신이 흐려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시스템은 그를 필요할 때마다 다시 만들어내고, 필요 없을 때는 삭제해버립니다. 그는 살아있지만 동시에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변함없이 ‘미키’라고 불러주는 단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샤입니다.
나샤는 그가 몇 번째 미키인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전과 같은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미키를 사랑합니다.
과거가 어떠했든, 시스템이 그를 어떻게 정의하든, 그녀에게 미키는 여전히 미키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믿는 한, 미키는 대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존재로 남습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해줍니다.
세상이 미키를 필요할 때 만들어지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소모품으로 취급해도, 나샤에게 그는 언제나 사라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받는다는 사실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감각이야말로 그가 ‘나’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자신의 가치를 의심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평가를 요구하고, 성과를 내야만 의미 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때로는 자신의 역할이 사라질까 두려워하며, 내가 정말로 필요한 존재인지 불안해집니다. 하지만 영화는 조용히 속삭입니다.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미키는 나샤의 사랑 속에서 자신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이 몇 번째 미키인지, 혹은 시스템이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더 이상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나샤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살아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의 역할이 바뀌어도, 우리의 기억이 흐려져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아오면서, 사랑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잊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랑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어떤 모습이든, 어떤 순간에 있든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감정입니다.
결국, 미키 17은 SF 영화가 아니라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이 사라지고 신체가 변해도, 우리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우리 자신일 수 있습니다. 미키가 마지막까지 찾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때때로 세상은 우리를 평가하고,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미키 17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가장 따뜻한 위로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