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딜레마를 파고드는 사회파 미스터리
매년 여름, 우리는 익숙한 기대를 안고 <명탐정 코난>의 극장판을 맞이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액션, 허를 찌르는 트릭, 그리고 20년 넘게 이어져 온 애틋한 로맨스. 코난의 극장판은 하나의 즐거운 약속이자 장르적 관습이었다.
그리고 2025년의 스크린을 뒤덮은 새하얀 설원, <명탐정 코난: 척안의 잔상>은 그 익숙한 약속의 세계에 서늘하면서도 한국 사회에서 익숙하게 제기되는 문제의식을 가져와 기존 극장판의 기성품과 같은 흐름에 균열을 낸다.
이 영화는 ‘사법거래’와 ‘사적 제제’라는, 현실 법체계의 가장 민감하고 복잡한 딜레마를 이야기의 심장부로 과감히 끌고 들어온다. 소년 탐정의 명쾌한 수수께끼 풀이가 아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잘 짜인 사회파 미스터리의 서늘한 공기를 품고 있다.
<명탐정 코난 : 척안의 잔상>이 던지는 이 질문의 무게는, 법의 허점이 어떻게 평범한 한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지를 처절하게 그린 영화 <모범시민(Law Abiding Citizen)>의 궤적과 겹쳐진다.
두 영화는 모두 시스템에 의해 가장 소중한 것을 잃고, 그 시스템 자체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겨누는 한 개인의 투쟁을 그린다. 하지만 비슷한 비극에서 출발한 두 주인공이 걷는 상이한 길과 그들이 맞이하는 전혀 다른 결말을 나란히 놓고 보면, 비로소 <척안의 잔상>만이 도달한 독창적이고 성숙한 시선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부터 두 영화의 서사를 비교의 틀로 삼아 <척안의 잔상>이 ‘정의’와 '사법거래', 그리고 '사적제제'라는 이름의 딜레마를 얼마나 집요하고 섬세하게 파고들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 이 리뷰는 <명탐정 코난 : 척안의 잔상>과 영화 <모범시민>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
모든 비극의 씨앗은 ‘사법거래’라는 이름의 원죄에서 움튼다. <척안의 잔상>의 범인이자 공안 소속 엘리트, 그리고 <모범시민>의 평범한 가장 클라이드 셸턴. 사회적 지위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두 사람이지만, 그들은 법이 자신의 존엄과 사랑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동일한 상처를 공유한다.
그 상처는 시스템에 대한 배신감이자, 세상의 정의가 실은 얼마나 연약하고 이기적인 논리 위에 서 있는지를 깨달은 자의 근원적 절망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한다는 암묵적인 사회 계약 위에 존재하지만, 두 사람은 바로 그 계약이 눈앞에서 파기되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척안의 잔상>의 범인은 촉망받던 바이애슬론 선수였던 연인이 범죄 조직의 소행으로 꿈을 잃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을 겪는다.
그는 법의 심판을 기다렸지만, 그가 마주한 현실은 가해자 중 한 명이 경찰과의 ‘사법거래’를 통해 죄의 무게보다 훨씬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사회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법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정의는 공익이라는 이름 아래 그의 슬픔을 외면했다.
<모범시민>의 클라이드가 겪는 비극은 더욱 직접적이고 잔인하다. 그는 아내와 딸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지만, 담당 검사는 자신의 ‘승률’이라는 지극히 관료적인 이유로 주범과 ‘사법거래’를 맺는다. 정의는 그렇게 거래되고, 계산되고, 결국 패배한다.
두 영화는 이 지점에서 서늘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더 큰 악을 잡기 위해’(공익), 혹은 ‘확실한 유죄 판결을 위해’(효율)라는 시스템의 거대 담론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을 복구 불가능한 폐허로 만드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법의 이름으로 행해진 합법적 거래가, 역설적으로 법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마저 뿌리부터 뒤흔들고, 결국 복수라는 이름의 괴물을 탄생시키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시스템을 신뢰하지 않는다. 스스로 법이 되고, 심판자가 되어 무너진 정의의 저울을 자신의 손으로 다시 맞추기로 결심한다. 이는 가해자에 대한 감정적 분노를 넘어, 법이 외면한 정의의 공백을 스스로 메우려는 위험하고도 슬픈 결단이다.
시스템에 대한 불신이라는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했지만, 두 남자가 선택한 복수의 길은 그들이 시스템과 맺고 있는 관계만큼이나 극명하게 갈린다.
한 명은 시스템의 심장부에서, 다른 한 명은 시스템의 가장 바깥에서 각자의 전쟁을 시작한다. 그들의 복수는 단순한 가해 행위를 넘어, 시스템의 본질에 대한 각자의 철학을 담은 선전포고와도 같다.
<척안의 잔상>의 범인은 ‘공안’이라는, 국가 시스템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내부자다. 그는 시스템의 언어와 작동 방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 권력과 정보를 역이용해 자신의 복수를 실행한다.
그의 복수는 분노의 뜨거운 폭발이라기보다는, 차가운 이성으로 계획된 외과수술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완벽히 위장한 채, 과거 사건의 진실을 묻으려는 관련자들을 하나씩, 마치 불필요한 종양을 제거하듯 처리해 나간다.
그의 최종 목표는 단순히 개인적인 복수를 넘어, 국가 기밀을 탈취해 정부를 협박하고 ‘사법거래 확장 법안’ 자체를 무산시키는 것이다.
이는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파괴’하기보다는, 그 오류를 강제로 ‘수정’하고 자신의 논리대로 ‘통제’하려는, 지극히 오만하고 뒤틀린 시도라 할 수 있다. 그의 저항은 시스템의 논리를 내재화하여 그 자체를 공격하는, 일종의 자가면역질환처럼 보인다.
반면, <모범시민>의 클라이드는 시스템에서 완전히 버림받고 배제된 외부자다. 그의 복수는 도시 전체를 패닉에 빠뜨리는, 공개적이고 무차별적인 폭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스스로 감옥에 갇힌 채, 마치 전능한 신처럼 도시의 사법 시스템 전체를 조롱하며 판사와 검사, 변호사를 차례로 살해한다.
그의 목표는 시스템의 ‘수정’이 아닌, 완전한 ‘파멸’이다. 그는 시스템이 개선될 수 있다는 일말의 희망조차 버렸으며, 그 위선과 무능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잿더미로 만드는 것만이 유일한 정의의 실현이라고 믿는다.
그의 복수는 통제가 아닌, 혼돈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그는 시스템의 언어를 부정하고, 오직 폭력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언어로만 세상과 대화하려 한다.
두 인물의 상반된 복수 방식은, 시스템에 저항하는 개인의 서로 다른 절망의 깊이와 철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명은 시스템의 논리를 이용해 시스템의 모순을 공격하고, 다른 한 명은 시스템 밖에서 시스템 자체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는 정의를 잃어버린 자가 택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두 가지 길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두 남자의 처절한 복수는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가. 바로 이 마지막 장에서, <척안의 잔상>은 <모범시민>이 가지 않은, 훨씬 더 복합적이고 성숙하며, 그래서 더욱 씁쓸하고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길을 선택한다. 그것은 바로 파국 너머의 세계, 복수와 정의의 이분법이 무너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인간성의 희미한 빛을 포착하려는 시도다.
<모범시민>의 클라이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시스템과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며, 자신의 복수와 함께 폭발 속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죽음은 관객에게 ‘과연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해결되지 않는 강력한 질문만을 흉터처럼 남긴 채, 어떤 희망의 여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저항은 순수한 분노의 파국으로 끝을 맺으며, 시스템과 개인의 화해 불가능성을 비극적으로 증명한다.
하지만 <척안의 잔상>의 범인은 가장 아이러니하고도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된다. 그는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고 체포된 후, 죽은 연인과 그 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그토록 증오했던 ‘사법거래’를 스스로 받아들인다.
이는 시스템에 대한 변절이나 패배 선언이 아니다. ‘사법거래’라는 시스템을 증오해 벌인 자신의 모든 범죄가, 역설적으로 자기 자신을 가장 증오했던 ‘사법거래’의 테이블로 다시 밀어 넣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는 복수에 대한 집착으로 자신의 신념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기모순을 감내해야만 하는 상항이 되었고 끝내는 자신이 꿈꿨던 복수를 넘어선 어떤 가치를 지키려 한 셈이다.
그가 끝내 공안의 사법거래를 받아들이는 행위는 자신의 저항이 실패했음을 인정하는 처절한 현실 인식이자, 복수라는 파괴적인 행위의 공허함을 깨달은 자의 마지막 속죄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는 이 범인의 비극적인 자기모순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진정한 구원의 길을 조용히 제시한다. 바로 ‘아버지의 용서’다.
범인과 똑같이 ‘사적 제제’를 꿈꾸며 가해자를 찾아 헤맸던 연인의 아버지는, 그 가해자가 진심으로 속죄하는 모습(겨울 내내 딸의 무덤에 누구도 모르게 꽃과 따뜻한 흙을 가져다 놓는 행위)을 알게 된 후, 복수의 칼을 내려놓고 그를 용서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두 범인이 제시한 법의 심판이나 개인의 복수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뛰어넘는, 제3의 길이다. 법이 다루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 죄책감과 연민이라는 감정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화해다.
<모범시민>이 끝내 보여주지 못했던, 증오의 연쇄를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 즉 인간의 진심 어린 ‘속죄’와 그에 응답하는 ‘용서’를 통한 구원의 잔상을 <척안의 잔상>은 스크린 위에 비춘다.
<모범시민>이 시스템의 실패에 대한 통렬하고 직설적인 고발장이라면, <척안의 잔상>은 그 실패가 낳은 비극의 잿더미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찾아야 할 답은 무엇인지를 묻는 깊이 있는 성찰 보고서다.
두 영화 모두 ‘사법거래’라는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며 ‘사적 제제’의 정당성에 대한 위험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 끝에서 전혀 다른 풍경을 관객에게 선사하며 각자의 철학적 깊이를 드러낸다.
<모범시민>이 타협 없는 파멸을 통해 관객의 마음에 지워지지 않는 질문의 흉터를 남긴다면, <척안의 잔상>은 가장 아이러니한 타협과 가장 숭고한 용서를 병치시키며, 법이 미처 답하지 못하는 인간 구원의 영역을 이야기한다.
범인의 마지막 선택이 보여준, 시스템의 거대한 힘 앞에 선 개인의 처절한 현실 인식과, 아버지가 보여준 기적과도 같은 용서는 이 영화를 기존 명탐정 코난 애니메이션 극장판이 보여왔던 평면적인 서사를 넘어, 우리 사회의 정의 시스템에 대해 오랫동안 곱씹어볼 만한 질문을 던지는 수작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영화는 명쾌한 답을 내리는 대신, 우리에게 더 근원적인 질문을 남긴다. 법의 저울이 기울어져 정의가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복수의 총을 들 것인가, 아니면 용서라는 이름의 따뜻한 흙을 한 줌 더 덮어줄 것인가. 그 선택의 무게를 가늠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척안의 잔상>이 도달한 가장 빛나는 성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