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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은 어떻게 스스로를 배반했는가

영혼을 팔아 흥행을 사려 했으나, 결국 이야기의 심장만 멎었다.

by Just Be

부서진 거울, 왜곡된 반영


모든 위대한 각색은 원작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때로는 그 거울이 원작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하고, 때로는 새로운 각도로 빛을굴절시켜 숨겨진 아름다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그 거울은 산산조각 나 원작의 형상을 기괴하게 왜곡하고 본질을 흐트러뜨린다.


2025년 여름, 마침내 베일을 벗은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이하 <전독시>)은 안타깝게도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수백만 독자를 열광시킨 신화적 웹소설의 영상화라는 거대한 기대감 속에서 탄생한 이 영화는, 상업적 성공이라는 목표를 향해 질주한 나머지 자신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망각한 비극적 결과물이다.


물론 제작진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300억이 넘는 제작비, 600만이라는 손익분기점, 그리고 원작을 모르는 대중을 끌어안아야 한다는 상업적 압박감은 실로 거대했을 것이다.


김병우 감독이 언급한 '교통정리'와 '연대'라는 키워드는 이러한 현실적 타협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계산된 상업적 선택'이 성공적이었는가와는 별개의 문제다. 즉, '각색'으로서 이 영화는 과연 적절했는가? 더 나아가,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화 <전독시>는 원작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실패이며, 그 결과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배반한 공허한 블록버스터로 전락했다. 이는 단순히 몇몇 설정이 바뀌거나 스토리가 압축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원작의 심장이었던 주인공 '김독자'의 영혼을 제거하고, 그 뼈대를 이루던 '메타 서사'라는 철학을 뽑아낸 뒤, 그 빈자리를 할리우드식 영웅 서사와 감성적 연대라는 익숙하지만 얕은 재료로 채워 넣었다.


이 글은 영화 <전독시>가 저지른 세 가지 치명적인 오류를 통해 각색의 실패 원인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하나의 위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매체의 벽 앞에서 좌초하고, 자본의 논리 앞에 그 영혼을 잠식당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비루한 각색과 흔하디 흔한한 주제의식에 대한 오만한 선민의식에 의해 시대를 풍미했던 걸작이 어떻게 오해되고 배반당했는지, 무엇이 원작 팬들을 이토록 분노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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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죽음: 당신이 아는 '김독자'는 여기에 없다


각색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원작의 핵심 캐릭터를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스크린에 구현해냈는가에 있다. 캐릭터는 서사의 심장이자, 독자/관객이 세계와 소통하는 창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영화 <전독시>의 가장 근본적인 실패는 주인공 '김독자'의 본질을 완벽히 오해하고, 그를 전혀 다른 인물로 재창조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원작의 '읽는 자(The Reader)' 김독자를 살해하고, 그 자리에 익숙하지만 몰개성적인 '싸우는 자(The Hero)' 김독자를 세워두었다.




원작의 심장: '읽는 자'로서의 김독자


원작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의 심장을 단 하나의 단어로 정의해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읽기(Reading)' 행위 그 자체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 행위의 화신(化神)이다. 그는 13년 동안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을 완독한 유일한 독자다.


그의 힘은 초인적인 신체 능력이나 마법 재능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의 권능은 오직 '미래를 알고 있다'는 독점적 정보, 즉 텍스트와 서사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서 나온다.


원작 속 그의 핵심 스킬들은 이러한 정체성을 명확히 증명한다. [전지적 독자 시점]은 타인의 내면을 훔쳐보는 '읽기' 능력이며, [책갈피]는 다른 인물의 능력을 잠시 '인용'하는 기술이다. 그가 구사하는 필살기 [전인화]조차 스스로의 힘이 아닌, 다른 존재의 설화를 빌려오는 것이다.


그는 본질적으로 창조자가 아닌 해석가이며, 전사가 아닌 전략가다. 그의 모든 행동은 자신이 읽어온 텍스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를 바탕으로, 비극으로 정해진 결말을 바꾸려는 처절한 '재독(re-reading)'이자 '비평적 개입'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내면세계다. 김독자는 감정의 격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심리적 방어기제 [제4의 벽] 뒤에 서서 세상을 관조한다. 그는 때로 냉소적이고, 극도로 계산적이며, 대의를 위해서라면 비정해 보일 정도의 합리적 선택을 감행한다.


이는 그가 이 세계를 한 편의 '소설'로 인식하고, 등장인물들과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동료들이 그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다가, 그가 점차 세계의 주요 인물로 인정받으면서 인상이 뚜렷해진다는 묘사는, 그의 정체성이 '관찰자(독자)'에서 '참여자(등장인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탁월한 문학적 장치다.


이처럼 원작의 김독자는 단순한 주인공이 아니라, '이야기와 독자의 관계'라는 작품의 거대 주제를 온몸으로 구현하는 상징적 존재다.





스크린의 배반: '보통 사람'이라는 이름의 영웅


그러나 스크린 속 김독자는 이 모든 특성을 거세당했다. 영화는 원작의 지적이고 냉소적인 전략가를, 어리숙하고 감정적이며 상황에 휩쓸리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재정의한다.


배우 안효섭이 인터뷰에서 "독자는 멋진 인물이 아니며, 모두가 독자가 될 수 있다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말이나, 제작진이 그를 '보편적인 보통 사람'으로 만들려 했다는 증언은 이러한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선택은 상업 영화의 논리에서는 이해 가능하다. 관객이 감정적으로 쉽게 이입할 수 있는 평범한 인물이 재난 상황에 던져져 영웅으로 성장하는 서사는 가장 대중적이고 검증된 흥행 공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독시>의 경우, 이 선택은 작품의 근간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오판이다. 김독자의 '평범함'은 그의 비범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었지, 캐릭터의 핵심 정체성이 아니었다. 그의 본질은 평범한 직장인이었기에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 평범한 직장인이 세상의 유일한 '독자'였기에 특별했던 것이다.


한 평론가의 지적처럼, 원작에서 김독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에 대단히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영화에서는 그냥 칼이나 휘두를 줄 아는 인물이 되었다.


영화 속 김독자는 미래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에 의존해 우왕좌왕하고, 종종 상황에 압도되어 당황하며, 위기의 순간을 임기응변과 점차 강화되는 물리적 전투력으로 해결해 나간다. 이는 <전독시>의 김독자가 아니라, 수많은 재난 영화와 블록버스터에서 반복적으로 보아온 영웅의 원형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영화 <전독시>의 김독자는 원작의 이름을 빌려왔을 뿐, 전혀 다른 영혼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텍스트에 대한 '지식'과 '이해'는 단순한 '정보'로 격하되었고, 세계와 거리를 두던 그의 독특한 내면은 보편적 공감을 위한 '인간미'로 대체되었다.


이는 캐릭터의 각색이 아니라, 작품의 주제 의식을 담고 있던 그릇 자체를 깨부순 행위다. '독자'가 사라진 <전지적 독자 시점>에 남은 것은, 제목의 의미마저 상실한 공허한 액션 활극뿐이다. 영화는 가장 안전한 길을 선택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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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실종: '이야기'는 어떻게 '연대'가 되었나


캐릭터의 영혼을 제거한 영화의 칼날은 곧장 서사의 심장으로 향한다. 영화 <전독시>의 두 번째 비극은 원작이 품고 있던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철학, 즉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meta-narrative)'를 스스로 포기하고, 그 자리를 훨씬 더 안전하고 보편적이지만 지극히 평범한 '연대'라는 가치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원작의 정수: '설화(說話)'와 세계의 구성


원작 <전독시>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단 하나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그것은 '설화(說話)'다. 이 세계관에서 설화는 배경 설정이나 스킬의 이름에 머물지 않는다. 설화는 존재의 근원이자 정체성의 증명이며, 세계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법칙이 되기도 한다.


이야기들이 모여서 존재를 만들기 때문에 모든 인물은 자신만의 설화를 쌓기 위해 투쟁하고, 그 설화의 무게와 등급이 곧 그들의 힘과 위상을 결정한다. 유중혁의 [회귀자]라는 설화, 이순신의 [해상전의 신]이라는 설화까지, 모든 것은 이야기로 귀결된다.


우리는 신화, 역사, 소설,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담이라는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자아를 형성한다. <전독시>는 이 추상적인 철학을 '설화'라는 시스템을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지적인 쾌감과 깊은 공감을 동시에 선사했다.


더 나아가 원작은 '주인공-독자-작가'라는 서사의 삼각구도를 유중혁, 김독자, 한수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완벽하게 의인화한다.


끝없이 회귀하며 고통받는 주인공 유중혁, 그의 모든 실패와 고뇌를 13년간 지켜보며 그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 독자 김독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짜고 뒤엎을 수 있는 창조주이자 작가인 한수영.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동료애나 적대감을 넘어, 하나의 이야기를 둘러싼 창작자와 수용자의 복잡미묘하고 애증 어린 관계를 상징한다.


원작자 싱숑이 <전독시>가 근본적으로 "'이야기' 또는 '읽기' 자체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킨다. <전독시>는 재난 판타지가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이야기를 통해 존재하고, 어떻게 이야기를 통해 구원받는가'에 대한 장대한 철학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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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의 도피처: 안전한 '연대'라는 신화


그러나 이토록 복잡하고 지적인 메타 서사는 2시간 남짓의 상업 영화에 담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고 어려운 과제였다. 결국 제작진은 이 거대한 철학적 기둥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훨씬 더 설명하기 쉽고, 감성적으로 호소하기 용이하며, 대중적으로 검증된 '연대'라는 주제를 이식했다.


김병우 감독은 시나리오 작업 과정에서 '연대'와 관련이 적은 장면들을 압축하고, "서로 잘 알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영화의 핵심으로 삼았다고 명확히 밝혔다.


물론 원작에도 연대의 가치는 분명히 존재한다. '김독자 컴퍼니'라는 이름 아래 모인 동료들의 유대는 서사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다. 하지만 원작에서 연대는 '같은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나간다'는, 즉 '공동의 설화를 구축한다'는 메타 서사의 하위 개념이자 결과물이었다.


그들은 재난적 위기를 함께 극복하기 위해 뭉친 것이 아니라, '김독자'라는 새로운 변수를 통해 기존의 비극적 서사를 다시 쓰기 위해 모인 '공동 저자들'에 가까웠다.


그러나 영화는 이 인과관계를 뒤집어 버린다. 영화에서 연대는 그 자체로 숭고한 목표이자 모든 갈등을 해결하는 만능 열쇠처럼 기능한다. 왜 이들이 함께해야 하는가에 대한 '설화'적 고민은 생략된 채, 재난 상황 속에서 피어나는 막연한 동지애와 인간미가 그 자리를 채운다.


원작자 싱숑조차 영화가 "원작에서 다룬 주제 대신, 2시간 안에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고 평하며, 이러한 주제의 치환을 에둘러 인정했다. 이는 제작진의 선택이 얼마나 의도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영화 <전독시>는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는 전무후무한 도전을 포기하고, <부산행>, <신과 함께> 등 수많은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어 온 'K-블록버스터'와 'K-연대'의 안전한 공식으로 회귀했다. 이는 가장 독창적인 무기를 버리고 가장 낡은 무기를 선택한 것과 같다.




의미의 증발: 그래서 무엇이 사라졌는가?


주제의 치환은 이야기의 결을 바꾸는 것을 넘어, 원작이 가진 거의 모든 의미를 증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설화'라는 개념이 희미해지면서, 등장인물들의 행동 원리는 평면적으로 변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이야기'를 얻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눈앞의 괴물을 물리치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위해 싸우는 지극히 평면적인 게임 캐릭터처럼 보인다.


'성좌'들의 역할 역시 모호해졌다. 원작에서 성좌들은 화신들에게 코인만 지원하는 일방향적 후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를 소비하고 개입하며 때로는 직접 설화가 되는 '상위 독자' 집단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모든 이야기는 누군가에 의해 읽히고 평가받는다'는 창작의 본질을 상징했다. 그러나 영화에서 성좌들은 정체불명의 메시지를 보내고 코인을 후원하는,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deus ex machina'에 가깝게 묘사된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구원'의 의미가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원작에서 김독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야기의 구원'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한 주인공 유중혁과 동료들이 비극적 결말에 이르지 않도록, 즉 '이야기' 자체가 해피엔딩을 맞이하도록 모든 것을 바친다.


그의 구원은 특정 인물을 살리는 것을 넘어, 서사 전체를 구원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영화에서 구원은 '동료를 지키는 것'이라는 훨씬 더 개인적이고 물리적인 차원으로 축소된다. 이는 숭고한 비극을 평범한 휴먼 드라마로 격하시키는 행위다.


결국 '연대'라는 보편적 가치를 얻는 대가로, 영화 <전독시>는 자신이 왜 <전지적 독자 시점>이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모두 잃었다. 이것은 단순한 각색의 실패가 아니라, 서사의 죽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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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버스터의 함정: 스펙터클은 어떻게 서사를 잠식했는가


주인공의 정체성을 바꾸고 서사의 핵심을 도려낸 제작진의 선택은,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필연성을 찾을 수 있다.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문제점은 300억이라는 제작비와 600만이라는 손익분기점을 감당해야 하는 상업 영화의 숙명, 즉 '블록버스터의 함정'으로 귀결된다. 영화는 더 많은 관객을 매혹시키기 위해 선택한 화려한 스펙터클과 빠른 속도감에 스스로 발목을 잡혀 서서히 질식해갔다.



속도전의 저주: 압축과 생략의 딜레마


김병우 감독 스스로 '교통정리'라고 표현한 영화의 각색 과정은, 원작의 방대하고 복잡한 세계관을 2시간짜리 영화에 구겨 넣기 위한 극단적인 압축과 생략의 연속이었다.


영화는 지하철 장면이 끝나자마자 쉴 틈 없이 다음 시나리오로 관객을 몰아붙인다. 이러한 속도감은 장르적 쾌감을 줄 수 있지만, <전독시>의 경우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했다.


원작의 매력 중 하나는 '시나리오'라는 재난 상황 속에서도 인물들이 숨을 고르고, 서로를 탐색하며, 전략을 짜고, 때로는 철학적 고민에 빠지는 '밀도 높은 여백'에 있었다. 독자들은 이 여백 속에서 캐릭터들의 내면 변화를 따라가고, 복잡한 세계관의 규칙들을 서서히 학습하며 이야기에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한다. 캐릭터들은 충분한 동기 설명 없이 만나고 헤어지며, 관객은 그들의 관계 변화에 감정적으로 동참할 틈을 얻지 못한다.


특히 '배후성 시스템'이나 '성흔', '설화 등급'과 같은 핵심 설정들은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스쳐 지나가거나, 후속작을 위해 의도적으로 미뤄진다. 이는 원작을 모르는 관객에게는 불친절함으로, 원작을 아는 팬들에게는 세계관의 깊이를 훼손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한 평론가가 지적했듯, 영화의 '극단적인 템포'는 원작 팬조차 따라가기 벅차게 만들며, 방대한 서사를 압축하는 과정에서 개연성의 구멍을 수없이 노출한다. 결국 영화는 "이 사건 다음에 저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의 나열만 남았을 뿐, "왜 그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는가"에 대한 설득력을 상실했다.





시각적 쾌락의 역설: 볼거리는 남고, 이야기는 떠나다


블록버스터의 가장 큰 미덕은 단연 '볼거리'다. 영화 <전독시> 역시 이 미덕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CG와 액션 시퀀스에 쏟아부었다. 금호역의 어룡, 충무로의 그류폰, 그리고 다양한 화신들과 괴수들의 전투는 분명 기술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그러나 문제는 이 화려한 스펙터클이 서사를 보조하는 것을 넘어, 서사 자체를 집어삼키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 원작의 김독자는 칼을 휘두르는 전사가 아니라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전략가였다.


그의 진정한 전투는 전장에서가 아니라, 시나리오의 허점을 파고들고 성좌들의 심리를 이용하며, 미래의 정보를 활용해 최적의 수를 계산하는 그의 머릿속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영화는 이러한 내면의 지적 투쟁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어려운 길 대신, 주인공에게 칼을 쥐어주고 괴물과 싸우게 하는 훨씬 쉽고 직관적인 길을 택했다.


그 결과, 영화의 대부분은 김독자와 동료들이 무언가와 싸우거나,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관객은 안효섭과 이민호의 멋진 액션을 감상할 수는 있지만, 그들이 왜 싸워야 하는지, 이 싸움이 어떤 '설화'적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박탈당한다.


시각적 쾌락이 정점에 달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이야기의 밀도는 가장 옅어진다. 스펙터클은 서사의 공백을 감추기 위한 알리바이가 되었고, 현란한 볼거리는 오히려 작품의 지적 깊이를 얕게 만드는 족쇄로 작용하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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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차이즈의 족쇄: '다음'을 위한 영화의 한계


영화 <전독시>는 단 한 편으로 끝나는 영화가 아니라, 거대한 프랜차이즈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으로 기획되었다. 이러한 기획 의도는 영화 곳곳에 '프랜차이즈의 족쇄'를 채워 넣었다. 많은 핵심 설정과 떡밥들이 후속편을 위해 의도적으로 봉인되면서, 영화 자체의 완결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예를 들어, 김독자와 유중혁의 복잡한 관계, 한수영의 정체, '가장 오래된 꿈'의 비밀 등 원작의 핵심을 이루는 요소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영화는 이 모든 질문에 대해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이후 할리우드 프랜차이즈 영화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략이지만, <전독시>의 경우엔 그 정도가 지나치다. 관객은 2시간 동안 한 편의 온전한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이야기의 예고편 혹은 요약본을 본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러한 불완전함은 영화가 스스로의 이야기를 책임지지 않고, 미래의 가능성에 그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한 편의 영화로서 기승전결을 갖추고 관객에게 완결된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를 방기한 것이다.


상업적 성공을 위한 장기적인 포석이, 역설적으로 당장의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를 갉아먹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영화 <전독시>는 스스로를 위한 영화가 아니라, '다음을 위한 영화'라는 한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말았다.




실패한 각색이 우리에게 남긴 것


결론적으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원작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더 넓은 세상을 보려 했지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추락해버린 비운의 작품이다.


제작진은 '상업적 성공'과 '대중성 확보'라는 목표를 위해 원작이 지닌 가장 날카롭고 독창적인 부분들을 스스로 무디게 만들었다. 그 결과, 전무후무한 메타 서사의 철학을 담았던 한 시대의 걸작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블록버스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이 영화의 상업적 성패는 아직 단정할 수 없다. 화려한 볼거리와 스타 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손익분기점을 넘고 성공적인 프랜차이즈의 초석을 다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이 처음부터 제기했던 질문, 즉 '각색으로서 이 영화는 과연 적절했는가?'에 대한 대답은 명백히 '아니오'다. '올바른 각색'이 원작의 영혼을 계승하여 새로운 육체에 담아내는 것이라면, 영화 <전독시>는 원작의 영혼을 박제하여 화려한 상자 안에 담아 전시하는 것에 그쳤다.


이 실패는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넘어, 한국의 콘텐츠 산업이 거대한 'IP 유니버스' 시대를 맞이하며 앞으로 어떤 고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야기가 가진 본래의 힘과 철학을 존중하는 것과, 더 많은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상업적 변용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그 줄타기에서 가장 위험한 방식으로 떨어진, 교과서적인 실패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서사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긴 유일하고도 처절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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