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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딸>이 K-신파 방정식을 비튼 방식

낡은 공식을 구원하는 새로운 재료

by Just Be

돌아온 K-신파, 그러나 낯선 얼굴로


관객은 더 이상 쉽게 울지 않는다. 한때 대한민국 극장가를 지배했던 ‘K-신파’라는 강력한 흥행 공식은, 어느덧 관객의 자발적 눈물샘을 자극하기보다 의도된 감정 과잉에 대한 냉소와 피로감을 먼저 유발하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혈연으로 얽힌 인물들이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 앞에서 숭고한 희생을 감수하고, 비극적인 배경 음악과 함께 관객의 눈물을 강요하는 일련의 장치들은 수많은 작품을 통해 반복적으로 소비되며 그 효용성을 상당 부분 상실했다.


<7번방의 선물>의 경이로운 성공 이후, <국제시장>, <신과 함께>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주의와 신파적 감성이 자리했지만, 그 성공의 이면에는 ‘국뽕’, ‘억지 감동’이라는 비판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관객들은 이제 스크린 속 인물들의 불행에 무조건적으로 동화되기보다, 그 불행을 연출하는 감독의 손길을 먼저 의심하는, 영리하고 까다로운 비평가적 시선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K-신파는 점차 구시대의 유물이자 상업적 타성에 기댄 안전한 선택지로 여겨지며 그 생명력을 다해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2025년 여름, 이 낡고 익숙한 유물이 화려하게 귀환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좀비딸>은 ‘초반엔 웃기고 후반엔 울리는 'K-신파'의 가장 전형적인 공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동시대 관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압도적인 흥행을 기록하는 독특한 현상을 낳았다.


이 영화의 서사 구조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 예측 가능하다. 좀비가 된 딸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고군분투는 유쾌한 코미디로 시작해, 이내 숭고한 희생과 눈물겨운 부성애로 귀결된다. 이는 우리가 수없이 보아온 K-신파의 변주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명확해진다. 관객들은 왜 이미 답안지를 알고 있는 이 낡은 시험지에 다시 한번 열광적으로 응답했는가? 무엇이 <좀비딸>의 진부한 공식을 특별하게 만들었는가?


이 영화의 경이로운 성공은 과거의 낡은 공식의 반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식을 이루는 낡은 재료들을 교체하고 재조합하여 다른 차원의 감동을 빚어낸, 영리하고 섬세한 ‘상업영화의 연금술’에 그 비밀이 숨어있다.


본고는 <좀비딸>이 K-신파라는 낡은 그릇에 어떤 새로운 재료들을 담아냈으며, 그 재료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여 2025년의 관객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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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에 '도덕적 딜레마'를 주입하다


K-신파가 관객의 거부감을 유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감정의 강요로 느껴지는 ‘개연성의 부재’에 있다. 주인공이 겪는 시련이 작위적으로 느껴지거나, 그의 희생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할 때, 관객은 감정 이입을 멈추고 스크린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K-신파가 관객의 거부감을 유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종종 감정의 강요로 느껴지는 ‘단선적인 선악 구도’에 있다. 주인공이 겪는 시련이 단선적으로 느껴지거나, 그로 인해 그의 희생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지 못할 때, 관객은 감정 이입을 멈추고 스크린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기존의 성공한 신파 서사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거대한 시련 앞에 선 ‘선량하고 비난 불가능한 피해자’였다. <7번방의 선물>의 용구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내하는 인물들의 행동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은’ 것이었다.


관객은 그들의 희생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질문도 던질 필요 없이, 오직 연민과 슬픔이라는 순수한 감정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갈등은 언제나 주인공의 외부(부패한 권력, 시대의 아픔)에 존재했고, 주인공은 그저 선한 의지로 버텨내는 존재였다.


그러나 <좀비딸>은 원작의 ‘좀비’라는 설정을 영리하게 활용하여 이 단선적인 구조를 파괴하고, 주인공을 복잡한 ‘도덕적 딜레마’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다.


영화 속 딸 수아는 단순히 아픈 아이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사회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바이러스 보균자다. 따라서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 이정환(조정석 분)의 숭고한 사랑은, 동시에 수많은 타인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이 된다.


그는 더 이상 선량한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책임과 개인적 사랑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도덕적 딜레마의 주체가 된다.


이 지점에서 <좀비딸>의 신파는 기존의 K-신파와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의 깊이를 획득한다. 영화는 관객에게 단순히 “슬프지? 울어.”라고 강요하는 대신, “당신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훨씬 더 성숙하고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이정환의 부성애가 더 처절하고 절박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완벽하게 선한 행동이 아니라 도덕적 비난과 사회적 파멸을 감수하면서까지 지켜내려는 맹목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좀비’라는 극한의 설정은 이정환의 행동에 표면적인 당위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그 행동 이면에 숨겨진 윤리적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이처럼 K-신파에 ‘도덕적 딜레마’라는 지적인 고뇌를 주입한 것, 이것이야말로 <좀비딸>이 낡은 공식 속에서 새로운 감동을 길어 올린 가장 영리한 한 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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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된 부성애', 전통적 가족 서사의 확장


‘좀비’라는 설정이 신파의 논리적 당위성을 확보하는 외부적 장치였다면, 영화의 내적 동력을 만들어내는 핵심 재료는 바로 ‘확장된 부성애’라는 새로운 감정의 코어다. K-신파의 중심에는 언제나 혈연으로 맺어진 끈끈한 가족애가 있었다.


특히 아버지의 희생을 다루는 서사에서, 부성애는 종종 반론의 여지가 없는 생물학적 본능이자 신성한 의무처럼 그려졌다.


그러나 <좀비딸>은 주인공 이정환을 딸 수아의 친부가 아닌, 사고로 누나를 잃고 홀로 조카를 키우는 ‘삼촌’으로 설정함으로써 이 익숙한 공식을 영리하게 비튼다. 이 작은 설정의 변화는 영화 전체의 감정적 결을 바꾸고, 낡은 신파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주인공이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의 모든 희생을 ‘본능’의 영역에서 ‘선택’의 영역으로 이동시킨다. 만약 그가 친부였다면, 좀비가 된 딸을 지키는 그의 필사적인 노력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부성애의 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법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수아를 포기할 수 있는 완벽한 자유를 가진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꺼이 세상의 모든 비난과 위험을 감수하고 ‘아빠’가 되기를 선택한다.


영화 후반부, 수아의 친부가 보험금을 챙겨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장면은 이러한 ‘선택된 사랑’의 무게를 극적으로 강화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아버지는 책임을 저버렸지만, 혈연이 없는 삼촌은 기꺼이 그 책임을 짊어진다. 이 대비를 통해 영화는 관객에게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신파를 넘어선 묵직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이 ‘확장된 부성애’는 2025년의 관객들에게 훨씬 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한다. 전통적인 혈연 중심의 가족관이 해체되고, 1인 가구와 다양한 형태의 대안 가족이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이정환의 선택은 시대를 초월한 숭고한 희생을 넘어, 관계와 책임에 대한 현대적인 고찰로 읽힌다.


그의 사랑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낡은 명제를 뛰어넘어, ‘함께한 시간과 기억, 그리고 책임지겠다는 약속이 곧 가족을 만든다’는 새로운 정의를 제시한다.


관객들은 이정환의 눈물겨운 사투를 보며 전통적 가족 서사에서 일반적으로 발현되는 슬픔을 느끼는 것을 넘어, 그의 윤리적 선택에 깊은 존경심을 표하게 된다.


이처럼 <좀비딸>은 ‘확장된 부성애’라는 신선한 재료를 통해, 자칫 진부할 수 있었던 신파적 감정을 훨씬 더 입체적이고 숭고하며, 동시대적인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는 낡은 공식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그 공식의 핵심 엔진을 가장 현대적인 것으로 교체한 영리한 전략의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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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리한 완급조절', 관객을 지치지 않게 하다


아무리 강력한 설정과 숭고한 감정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2시간 내내 비극과 슬픔의 무게로 관객을 짓누른다면 결국 감정적 피로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 K-신파가 비판받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 ‘완급조절’의 실패에 있다.


많은 영화들이 초반부터 과도하게 감정을 몰아붙이다가, 정작 클라이맥스에서는 관객이 이미 지쳐버려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우를 범한다. <좀비딸>의 진정한 탁월함은, 원작 웹툰의 성공적인 각색을 통해 이 완급조절의 기술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현했다는 점에 있다.


영화의 성공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원작이 가진 두 가지 핵심 요소, 즉 ‘B급 병맛 코미디’와 ‘가슴 시린 비극’이라는 이질적인 감성을 스크린의 문법에 맞게 영리하게 재배치하고 조율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초중반부까지 관객이 신파의 무게를 거의 느끼지 못하도록, 원작의 코믹한 에피소드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새벽의 저주>를 연상시키는 좀비처럼 걸으며 위기를 탈출하려는 슬랩스틱, 딸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김밤순 할머니(이정은 분)와의 티키타카 등은 관객의 긴장을 효과적으로 이완시키고 캐릭터에 대한 깊은 애정을 쌓게 만든다.


이 코미디 시퀀스들은 관객의 웃음을 유발하는 것을 넘어, 이후에 닥쳐올 비극의 무게를 증폭시키는 중요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관객은 이 가족의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일상을 충분히 경험했기에, 그 일상이 파괴되는 순간 더 큰 슬픔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완급조절의 백미는 영화의 오리지널 설정인 ‘춤’이라는 모티프에서 드러난다. 초반부, 이정환과 수아가 함께 보아의 ‘No.1’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은 유쾌한 개그씬처럼 가볍게 소비된다.


하지만 이 장면은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좀비가 된 수아가 아빠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춤을 추는 결정적인 순간과 연결되며 엄청난 감정적 폭발을 이끌어낸다.


이는 관객이 무심코 지나쳤던 웃음의 기억이,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희망의 증거이자 눈물의 기폭제로 변모하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각본의 힘을 보여준다.


결국 <좀비딸>의 성공은 단순히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기 때문이 아니라, 관객이 신파의 무게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코미디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 웃음마저 눈물의 재료로 활용하는 감독의 영리한 ‘완급조절’ 덕분이다.


이 섬세한 리듬감이 관객을 2시간 동안 이야기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게 붙잡아두고, 마지막 감정의 폭발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낸 핵심 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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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신파의 재발명, 혹은 가장 영리한 생존술


결론적으로 <좀비딸>의 압도적인 흥행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영화의 성공은 낡은 공식의 안일한 답습이 아니라, 대중의 피로감을 정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영리하게 고안된 전략의 승리다.


영화는 ‘K-신파’라는 익숙하고 강력한 엔진을 유지하되, 그 엔진을 구동하는 핵심 부품들을 가장 효과적인 신소재로 교체했다.


‘좀비’라는 설정을 통해 신파에 도덕적 딜레마를 주입하고, ‘확장된 부성애’라는 현대적 감성을 통해 감정의 격을 높였으며, 원작을 기반으로 한 ‘영리한 완급조절’을 통해 관객이 감정적으로 소진되지 않도록 끝까지 이끌고 나갔다.


이 세 가지 새로운 재료의 영리한 조화는, ‘진부하다’는 비판에 직면했던 K-신파 공식이 어떻게 새로운 재료와 만났을 때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좀비딸>은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거나 K-신파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작품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는 스스로의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리한 완급조절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관습적인 신파의 힘에 과도하게 의존하며 감정의 과잉을 노출하고, 몇몇 주변 인물들의 선택은 서사의 개연성보다는 클라이맥스를 향한 기능적인 역할에 머무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점들마저도 이 영화의 가치를 온전히 훼손하지는 못한다. <좀비딸>은 한국 상업영화가 어떻게 관객의 변화에 발맞춰 기존의 공식을 성공적으로 변주하고 생존해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흥미롭고 시의성 있는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웃음과 눈물 끝에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한국 영화 산업에 던지는 의미 있는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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