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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멸의칼날 : 무한성편>에 관객이 열광하는 이유

시대의 불안을 위로하는 숭고한 비극의 힘

by Just Be

<귀멸의칼날 : 무한성편> 흥행의 이면


하나의 문화 현상이 탄생하는 데에는 단순한 이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2025년 여름, 극장가를 휩쓴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전례 없는 흥행 신드롬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이전에도 인기 시리즈의 극장판이 성공한 사례는 많았다. 하지만 그 성공은 대부분 미야자키 하야오나 신카이 마코토처럼 감독의 이름이 곧 브랜드가 되는 단독 작품이거나, <명탐정 코난>처럼 원작의 세계관을 빌려온 독립적인 오리지널 에피소드에 한정되었다.


원작의 긴 서사 중간 부분을 그대로 잘라내어 극장판으로 만드는 방식은, 기존 팬덤을 제외한 일반 관객에게는 거대한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며 흥행에 실패할 것이라는 게 업계의 오랜 불문율이었다.


<귀멸의 칼날>은 바로 그 불문율을 깨뜨렸다. <무한열차편>에 이어 <무한성편>까지, TVA 시리즈의 중간 부분을 그대로 옮겨온 이 극장판은 어떻게 독립적인 완결성을 지닌 거장들의 영역에 도전할 수 있었을까? 단순히 ‘원작의 인기’나 ‘뛰어난 작화’라는 표면적인 이유만으로는 이 기이한 열광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이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크린 내부의 미학적 성취를 넘어, 스크린 바깥의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동시대 관객들의 내밀한 심리적 결핍까지 아우르는 복합적인 시선이 요구된다. <귀멸의 칼날>의 성공은 작품의 힘인 동시에, 시대가 이 이야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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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지 않는 투자처, 스펙터클의 신뢰 자본


오늘날 관객에게 극장 관람은 단순한 문화생활을 넘어,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는 일종의 경제 행위가 되었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티켓 가격 앞에서, 관객들은 모험적인 선택보다는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하고 확실한 감정적 보상을 보장하는 ‘안전한 투자처’를 찾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귀멸의 칼날> 극장판은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로 떠올랐다. 이는 제작사 유포테이블이 TVA 시절부터 쌓아 올린 압도적인 퀄리티에 대한 강력한 ‘신뢰 자본’ 덕분이다.


원작 만화가 이미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귀멸의 칼날>이 하나의 ‘신드롬’으로 폭발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2019년 방영된 TVA였다.


유포테이블은 정적인 지면에서는 온전히 구현될 수 없었던 ‘호흡’이라는 개념을, 일본 전통화법인 우키요에를 연상시키는 유려한 2D 이펙트와 역동적인 3D 배경을 결합하여 스크린에 구현해냈다.


이는 원작의 서사적 힘이 TVA의 미학적 성취를 만나 폭발적인 시너지를 낸 순간이었고, 이 경험을 통해 대중의 뇌리에는 ‘귀멸의 칼날=최고의 퀄리티’라는 강력한 등식이 각인되었다.


이처럼 TVA를 통해 축적된 ‘신뢰 자본’은 관객에게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었다. <범죄도시> 시리즈의 마동석에게 기대하는 통쾌함처럼, 관객은 유포테이블에게는 값을 치를 만한 시청각적 쾌감을 기대한다.


‘이야기의 다음 편’을 본다는 서사적 욕구는, ‘유포테이블이 구현하는 최고의 스펙터클을 대형 스크린으로 체험한다’는 미학적 욕구와 결합하여 극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러한 ‘신뢰의 거래’가 가능해진 배경에는 변화된 미디어 환경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과거 수백 편에 달하는 시리즈의 진입 장벽은 OTT 플랫폼의 보편화로 인해 완전히 허물어졌다.


이제 관객은 극장판 개봉에 맞춰 단기간에 TVA 전체를 정주행하고, 충분한 예습을 마친 채 극장을 찾는 새로운 관람 문화를 형성했다. OTT가 극장판의 완벽한 ‘예습 교재’가 되고, 극장판은 다시 OTT의 ‘복습 교재’가 되는 거대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추억’과 ‘새로운 해석’으로 과거의 팬덤을 호출했던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 방식과는 또 다른, ‘현재진행형의 서사’와 ‘압도적인 시청각적 체험’을 무기로 새로운 관객마저 실시간으로 팬덤에 편입시키는, 동시대 미디어 환경에 최적화된 성공 방정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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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결핍을 위로하는 비극의 미학


그러나 관객이 이토록 가혹하고 슬픈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스펙터클의 화려함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표면적인 현상을 넘어, 우리는 이 작품의 비극적 세계관이 동시대 관객의 내면적 결핍과 깊이 공명하는 지점을 들여다봐야 한다.


<귀멸의 칼날>은 ‘과잉 책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비춘다. 작품의 세계관 속에서 국가나 사회 시스템은 개인을 온전히 보호해주지 못하며, 모든 비극은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 귀결된다.


오니에게 가족을 잃은 탄지로가 여동생을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 짊어진 책임, 그리고 <무한열차편>에서 렌고쿠 쿄쥬로가 마지막 순간까지 되뇌었던 “나는 나의 책무를 다할 뿐”이라는 대사는 이 세계관의 핵심을 관통한다.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자신의 노력과 희생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는 탄지로와 귀살대원들의 모습은, 신자유주의의 무한 경쟁 속에서 불안과 책임감에 짓눌린 관객들에게 강력한 감정적 동일시를 유발한다.


그들의 숭고한 투쟁과 비극적 희생을 통해, 관객은 자신의 내면에 쌓인 책임감의 무게를 위로받고 정서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이러한 거시적인 사회적 불안은, 상실을 애도할 방법을 잃어버린 개인의 내면이라는 미시적인 결핍으로 이어진다. <귀멸의 칼날>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며, 세속화된 사회를 위한 정교한 ‘애도의 의식’으로 기능한다. 작품 속 모든 죽음은 결코 헛되게 소비되지 않는다.


전투의 스펙터클 뒤에는 반드시 그 인물의 삶을 돌아보는 회상이 뒤따르며,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남은 자들이 그 의지를 ‘계승’하는 서사가 펼쳐진다. 심지어 적인 오니들조차 죽음의 순간에는 인간이었을 때의 슬픈 기억을 떠올리며 연민의 대상이 된다.


이는 단순한 선악 대결을 넘어, 모든 존재의 죽음을 존중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정교한 서사적 장치다. 전통적인 공동체와 애도 방식이 희미해진 현대 사회에서, 관객들은 이 스크린 속 의식을 통해 안전하게 슬픔을 체험하고 상실을 애도하며, 정서적 위안을 얻는 대리 체험을 하게 된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정상적인 애도 과정마저 방해받았던 시기에, 이 영화가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애도 의식’으로서 기능했다는 점은 그 흥행의 중요한 사회심리학적 단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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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수용: 미학과 역사의 길항(拮抗) 관계


이러한 보편적인 매력에도 불구하고, <귀멸의 칼날>이 한국 사회에서 수용되는 방식은 훨씬 더 복잡한 지형도를 그린다. 이는 작품이 가진 압도적인 미학적 체험과, 한국 관객의 내면에 자리한 정치적, 역사적 기억 사이의 긴장 관계 때문이다.


과거부터 한국의 대중은 일본의 문화 상품을 소비할 때, 정치/역사적 문제와 문화적 쾌락을 분리해 온 ‘선택적 수용’의 역사를 반복해왔다.


닌텐도 게임에 열광하면서도 한일전 축구에는 목숨을 걸고, <슬램덩크>에 감동하면서도 역사 교과서 문제에는 분노하는 이중적인 태도는 한국 사회의 복잡한 대일 감정을 드러내는 단면이다.


<귀멸의 칼날>은 이러한 딜레마를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작품의 배경인 다이쇼 시대와 주인공의 귀걸이 문양 등은 일부 관객에게 일본 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불편한 상징으로 작동한다. 실제로 특정 온라인 플랫폼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활발하게 형성되기도 한다.


하지만 흥미로운 지점은, 이러한 비판적 인식과 별개로 작품이 제공하는 압도적인 미학적 쾌감과 감동적인 서사는 분리되어 수용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귀멸의 칼날>의 스펙터클이 관객의 비판적 사유를 잠시 유예시킬 만큼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K-콘텐츠의 세계적 부상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더해진다. 과거 일본 대중문화를 소비할 때 기저에 깔려 있던 ‘문화적 위기감’이 상당 부분 해소되면서, 이제 한국 관객들은 더 큰 문화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일본 콘텐츠를 소비한다.


이는 무조건적인 수용이나 배척이 아닌, 작품의 미학적 성취는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문제점은 비판하는, 훨씬 더 복합적이고 주체적인 수용 태도를 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한국에서의 <귀멸의 칼날> 신드롬은, 관객들이 역사적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상징에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와 별개로 작품의 예술적 성취와 보편적 서사에 기꺼이 감동하는 ‘선택적 수용’의 복잡한 양상을 드러낸다.


이는 단순히 작품 하나에 대한 호오(好惡)를 넘어, 일본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한국 사회의 오랜 딜레마와 복잡한 내면을 비추는 흥미로운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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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담아낸 신드롬이 남긴 것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의 흥행은 하나의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의 성공을 넘어선, 시대적 요구와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맞물려 탄생한 거대한 문화 현상이다.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스펙터클의 약속’은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고,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개인이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는 시대의 불안을 위로하는 ‘숭고한 비극’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맥락 속에서 미학과 역사의 복잡한 길항 관계를 드러내며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


이 신드롬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영화 산업의 측면에서, <귀멸의 칼날>은 TVA와 OTT가 극장판의 ‘예고편’이자 ‘예습 교재’가 되고, 극장판은 다시 이들의 ‘확장판’이자 ‘이벤트’가 되는 강력한 선순환 구조를 증명해냈다.


이는 퀄리티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시리즈의 중간 토막조차 가장 강력한 극장 콘텐츠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또한 관객의 측면에서, 이 현상은 우리가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넘어, 각박한 현실 속에서 잃어버린 숭고함과 공동의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애도의 의식’을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신드롬의 가장 깊은 곳에는, 영화라는 콘텐츠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고, 함께 슬퍼하며, 다시 나아갈 힘을 얻고 싶은 우리 시대의 가장 솔직한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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