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마주한 얼굴, 그 뒤편의 괴물
연상호 감독의 <얼굴>은 한 편의 집요한 탐문의 과정이다. 40년간 땅속에 묻혔던 한 여인의 백골 사체에서 시작하는 이 미스터리는 범인 찾기의 단순한 쾌감을 기대한 관객의 예상을 배반하며, 자신의 제목이기도 한 '얼굴'이라는 가장 보편적인 기표(記標)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당신이 한 사람의 얼굴에서 읽어내는 정보는 과연 실체인가, 아니면 당신과 사회가 합의하여 덧씌운 허상인가?
<얼굴>이 겨냥하는 것은 외모에 대한 담론을 훌쩍 뛰어넘어, 우리가 진실을 인식하고 타인을 규정하며 공동체의 위선적인 신화를 구축하는 방식 그 자체를 해부하는 통렬한 사회 비평에 가깝다.
영화가 직조해내는 서사는 결국 세 가지 층위의 얼굴로 수렴된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규정되고 배제당하는 ①현상학적 얼굴, 상처받은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신화로 쌓아 올린 ②페르소나로서의 얼굴, 그리고 이 모든 비극을 용인하고 재생산하는 ③폭력적 질서로서의 공동체의 얼굴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얼굴은 서로 긴밀하게 얽히며 우리 시대를 향한 서늘한 질문을 완성한다.
<얼굴>의 가장 대담한 영화적 선택은 주인공 '정영희'(신현빈 분)의 얼굴을 러닝타임 내내 관객의 시야에서 배제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오직 타인의 입, 즉 파편적이고 악의적인 증언들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친척들은 그녀를 가문의 수치로 재단하고, 옛 공장 동료들은 모멸적인 별명으로 그녀의 정체성을 규정하며 동정이라는 미명 하에 타자화한다. 이 일관된 증언들은 실체가 부재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겹겹이 쌓여, 그녀를 하나의 그로테스크한 '괴물'로 완성시킨다.
여기서 감독은 의도적으로 스크린에 공백을 만듦으로써, 그 빈 공간을 등장인물들, 그리고 나아가 관객들의 상상과 편견으로 채우도록 유도하는 현상학적 실험을 감행한다.
우리는 정영희의 얼굴을 본 적 없음에도, 반복되는 증언의 나선 속에서 흉측하고 기이한 이미지를 무의식적으로 구축하게 된다. 그녀의 '부재하는 얼굴'은 사회적 낙인이 투사되는 거대한 캔버스이자, 공동체가 자신의 추함을 감추기 위해 동원하는 희생양의 제단이 된다.
그녀가 가졌던 진실의 얼굴인 가족의 불의를 고발하고 동료의 억울함을 위해 싸웠던 용기는 그 누구도 보려 하지 않는다. 오직 '못생겼다'는, 증명될 수 없는 낙인만이 그녀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인 진실처럼 통용된다.
이 모든 관객의 예상을 배반하고 지적 충격을 안기는 순간은 영화의 마지막에 찾아온다. PD 김수진이 마침내 구해온 정영희의 증명사진이 아들 임동환의 손에 들려 스크린을 채울 때, 관객은 가장 큰 혼란과 마주한다.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은 끔찍하지도, 기이하지도 않은, 너무나도 '평범한 얼굴' 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평범함은 역설적으로, 그녀를 괴물로 만든 것이 외피가 아닌 '시선의 폭력'이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잔인한 물증이 된다.
그녀의 얼굴은 스스로 현현(顯現)하는 방식이 아닌,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는 파열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덧씌워진 거짓을 폭로하며 견고했던 타자들의 세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정영희의 얼굴이 '지워짐'으로써 역설적으로 존재했다면, 그녀의 남편 '임영규'의 얼굴은 철저히 '만들어짐'으로써 존재한다.
그에게 얼굴은 육안으로 감각하는 신체 부위의 의미를 상실하고, 사회적 평판과 '장님임에도 예술의 경지에 오른 장인'이라는 명성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가면(Persona)' 으로 치환된다.
영화 초반, 다큐멘터리 인터뷰에 응하는 그는 시각의 한계를 넘어선 본질을 꿰뚫는 초월적 예술가로서의 페르소나를 과시한다. 그는 자신이 물리적 시각을 상실한 대신, 세상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더 높은 차원의 '눈'을 가졌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견고한 가면은, 아내 정영희의 사회적 얼굴(평판)이 '괴물'이었다는 사실을 제3자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평생 쌓아온 세계가 실은 주변인들의 동정과 조롱 위에서 유지된 신기루였을지 모른다는 끔찍한 의심에 사로잡힌다.
아들에게 모든 것을 실토하는 그의 처절한 독백은, 그가 시각적 열등감이라는 실존적 고통에서 단 한 순간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대목이다.
그가 예술을 통해 '보는 행위'의 무능함을 극복하고 승화시켰다는 믿음은, 실상 실존적 고통을 외면하고 억압해온 자기기만이었음이 드러난다. 결국 그의 예술은 구원의 증거가 아닌, 상처받은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정교한 방어기제로서 기능했을 뿐이다.
그의 삶의 목표는 '장님'이라는 굴레와 평생 받아온 멸시에서 벗어나, 오직 실력으로 존경받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내 정영희는 그 가능성을 믿어준 최초의 인물이었고, 그녀와의 결혼은 그가 멸시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온전한 세계(가정)를 구축하는 첫 단계였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알게 된 순간, 그는 자신이 구축한 이 작은 세계마저 외부의 조롱과 멸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아내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극복 서사'에 치명적인 흠집이자, 영원히 자신을 과거의 멸시 속에 묶어둘 족쇄처럼 느껴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살인은 훗날 자신이 완성하고자 하는 위대한 장인이라는 신화의 근간을 위협하는 '추한 진실'의 싹을 잘라내는 행위에 가깝다. 평생 자신을 옭아맬 수 있는 모멸감에서 벗어나 존경받는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가능성,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해 아내를 제거한 것이다.
아들에게 자신의 행위가 운명을 개척한 기적의 일부였다고 강변하는 모습은, 살인마저 서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자기기만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는 실존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타자를 지우고 자신만의 완결된 서사를 구축한 괴물이다.
영화 <얼굴>은 개인의 얼굴을 넘어, 한 사회가 유지되는 방식, 즉 '공동체의 얼굴' 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을 제시한다. 정영희를 향한 마을 사람들의 일관된 증언은 험담의 나열을 넘어,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고도의 장치로 기능한다.
그들이 보여준 추악한 행동은 한 개인을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희생양으로 삼아, 내부의 추악한 진실(성폭력, 가정폭력 등)을 은폐하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공동체의 암묵적인 합의이자 폭력이다.
그들은 모두가 정영희를 '괴물'이라 손가락질함으로써, 진짜 괴물인 자신들의 얼굴을 교묘하게 감춘다. 이는 르네 지라르가 설파한 '희생양 메커니즘'이 한 작은 공동체 안에서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섬뜩한 사례다.
정영희라는 존재는 공동체의 죄의식을 담아 추방해야 할 그릇이 되며, 그녀를 향한 집단적 멸시는 구성원들의 유대감을 확인하는 도착적인 의식이 된다.
이러한 폭력적 공동체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로서, 영화는 '저널리즘의 두 얼굴'을 교묘하게 대비시킨다. 한 명은 진실을 고발하고도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한 진정한 저널리스트 '정영희' 이고, 다른 한 명은 시청률이라는 욕망을 좇는 타락한 저널리스트 '김수진 PD' 이다.
정영희는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목소리를 냄으로써 진실의 무게를 증언했지만, 공동체는 그녀의 목소리 대신 그녀의 '얼굴'에 낙인을 찍어 진실을 매장했다. 반면 김수진 PD는 처음에는 정의 구현이 아닌, '자극적인 이야기'를 찾아 사건에 접근한다.
그녀의 카메라는 진실을 향한 사명감보다는 흥미로운 콘텐츠를 포획하려는 사냥꾼의 시선에 가깝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실 자체에는 무관심했던 이 기회주의적 저널리즘이 결국 정영희의 '평범한 얼굴'이라는 결정적 증거를 찾아내고 진실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한다.
이는 진실을 향한 순수한 의지가 공동체에 의해 어떻게 좌절되는지, 그리고 때로는 불순한 동기가 어떻게 의도치 않게 진실의 파편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주는 냉소적인 통찰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폭력성은 아들 '임동환'의 마지막 선택에서 정점에 달하며 다음 세대로의 전이를 암시한다. 아버지의 끔찍한 고백 앞에 무너져 내리던 그는, 결국 PD에게 아버지의 범죄를 덮고 거짓된 신화를 계속 유지해달라고 부탁한다.
이는 진실의 무게를 감당하고 공동체의 위선에 맞서는 대신, 그 거짓된 질서 속에 편입되어 안정을 택하는 나약한 개인의 초상이다. 아버지가 살인자라는 진실을 폭로하는 순간, 아들 자신 또한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새로운 낙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진실의 고통 대신 거짓의 안락을 택함으로써, 폭력적인 공동체의 질서를 스스로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공범이 되기를 자처한다. 그의 침묵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되는지에 대한 비극적 증명이 된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제목 <얼굴>은 한 사람의 외모(face)를 넘어, 우리가 감당하고 마주해야 할(face) 진실의 다층적인 면모와 그 윤리적 책임을 동시에 의미한다.
정영희의 '부재하는 얼굴' 은 사회가 만들어낸 편견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임영규의 '구축된 얼굴' 은 한 인간의 신화가 어떻게 자기기만 위에 세워지는지를 보여주며, 공동체의 '폭력적인 얼굴' 은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기꺼이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집단의 비정함을 드러낸다.
이 세 가지 얼굴은 서로 얽히며, 진실이 어떻게 개인의 실존적 불안과 공동체의 유지 욕망 속에서 파괴되는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영화는 마지막 순간, 정영희의 평범한 얼굴 사진을 통해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누군가를 판단할 때 보는 얼굴은 과연 무엇인가? 당신이 세상에 보여주는 당신의 얼굴은 온전한 실체인가? <얼굴>은 결국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가해자이자, 거짓된 신화에 기생하는 방관자일 수 있음을 서늘하게 암시한다.
더 나아가, 진실을 고발했으나 외면당한 정영희와 흥미를 좇다 진실을 마주한 김수진의 대비는 오늘날 저널리즘의 역할과 책임을 묻는다. 철학자 레비나스가 타인의 '얼굴'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절대적 윤리 명령을 발견했듯, 이 영화는 타인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본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윤리적 책임인지를 역설한다.
정영희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 얼굴 사진은,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진 뒤에도 오랫동안 우리를 떠나지 않으며, 우리 내면에 존재할지 모를 또 다른 괴물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