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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혁명과 언어

구호가 무너진 자리에 비로소 도착한 목소리

by Just Be

언어의 폐허 위에서


모든 혁명은 총구 이전에 한 문장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세계를 재정의하는 선언이고, 동지를 식별하는 암호이며, 불가능한 미래를 향한 약속이다.


언어는 추상적인 분노와 열망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흩어진 개인들을 ‘우리’라는 주체로 묶어내는 혁명의 청사진이자 동력이다.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언어의 한계는 곧 세계의 한계”이기에, 한 시대의 혁명적 언어가 힘을 잃고 화석이 된다는 것은 그들이 꿈꾸던 세계 자체가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해방을 외치던 구호는 의미 없는 껍데기로 남고, 동지를 확인하던 암호는 새로운 세대를 가로막는 낡은 규율로 전락한다. 언어가 생명력을 잃을 때, 그 언어가 지탱하던 혁명의 정신 또한 파산에 이른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해 다른 종류의 대답으로 끝을 맺는다. 혁명 조직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던 물음, “지금 몇 시인가?”. 이 암호는 한때 동지와 적을 식별하고 시대정신을 공유하는 강력한 언어적 기표였을 것이다.


그러나 16년이 흐른 뒤, 폴 토마스 앤더슨의 카메라는 이 질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세계, 즉 혁명의 언어가 파산해버린 시대의 풍경을 비춘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혁명의 성공이나 실패에 대한 정치적 평가를 내리는 대신, 그 언어가 소멸한 자리에 남은 이들이 어떻게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찾아 관계를 회복하고 윤리를 재건하는지를 집요하게 탐색한다.


영화는 이념의 구호가 붕괴된 폐허 위에서, 가장 원초적인 호명이야말로 다음 시대를 여는 유일한 혁명임을 냉정하고도 처연하게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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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한 혁명의 문법


초기 혁명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창조하는 행위였다. 2009년의 퍼피디아(테야나 테일러)와 동지들의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역동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습격을 ‘선전포고’로 명명하고, 폭탄 테러를 ‘자매들을 위한 경고’로 규정하며, 자신들의 행위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현실을 규정하고 동지를 결집시키던 강력한 언어는, 16년 후 생명력을 잃고 스스로를 옥죄는 규율로 전락한다. 동지를 구하기 위한 비상 연락망은 위기에 처한 ‘동지’보다 절차적 ‘암호’를 우선하는 관료주의의 벽이 되었다.


전화기 저편의 젊은 혁명가는 밥(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절박한 외침에 공감하기보다, 규율을 지키지 않는 구세대의 나태함을 심문한다 . 이는 혁명이라는 대의가 어떻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체제로 변질되어 스스로의 목적을 배반하는지를 보여주는 통렬한 희비극이다.


한때 해방의 도구였던 언어는 이제 새로운 세대의 권력이 되어 낡은 세대를 심판하는 도구로, 소통의 창구는 자격미달자를 걸러내는 필터로 전락한 것이다.


밥이 암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망각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거대 서사가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더 이상 구원하지 못하는 시대, 이념의 언어가 현실의 고통 앞에서 무력해진 시대의 알레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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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이름으로 떠도는 자


언어의 파산은 곧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한 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이름’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확인받는다. 과거의 밥에게는 ‘게토 팻’ 혹은 ‘로켓 맨’이라는, 그의 역할과 존재를 증명하던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혁명이 좌초된 후, 그는 ‘밥 퍼거슨’이라는, ‘산모와 함께 사산된 아기’의 신분을 빌려 살아간다. 이는 단순한 위장을 넘어, 그가 죽은 자의 세계, 즉 유령의 시간을 살고 있음을 암시하는 섬뜩한 은유다.


그의 편집증적인 불안과 약물 중독은 단지 쫓기는 자의 공포를 넘어,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적 확신을 잃어버린 자의 공허함에서 비롯된다.


법의 심판대 앞에서 경찰이 진짜 이름을 추궁하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피터 파커’ 같은 만화 주인공의 이름을 되는대로 둘러댄다 . 이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 붕괴되었을 때, 그 빈자리를 대중문화의 공허한 기호들이 채우게 됨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가 잃어버린 것은 단지 암호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자신을 자신으로 있게 하던 존재의 좌표 그 자체였다. 그는 이름 없는 자이기에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과거의 환영과 미래의 불안 사이를 영원히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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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를 넘어서는 호명


영화의 언어적 탐구는 ‘추파카브라 힐’의 대치 장면에서 절정에 달한다. 모든 추격이 멎고 딸 윌라(체이스 인피니티)와 마주한 순간, 공포에 질린 윌라는 20세기의 낡은 TV 쇼 제목들로 이루어진, 생존을 위한 새로운 암호를 미친 듯이 외친다.


이는 의미가 아닌 오직 식별 기능만 남은 언어, 그녀가 붙들 수 있는 마지막 방어기제다. 이때 밥은 정답(암호의 화답)을 말하는 대신, 암호의 문법 자체를 파괴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시스템 바깥의 목소리, 모든 코드 이전에 존재하는 근원적 언어로 딸을 부른다.


윌라가 불신에 가득 차 누구냐고 물었을 때, 밥은 과거의 영광이나 위장 신분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규정하는 단 하나의 관계적 좌표로 응답한다. "네 아빠야(It’s your dad)". 이 짧은 호명은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혁명적 전환이다.


이념이 인간을 호명하던 시대를 지나, 한 인간이 관계 속에서 타인의 이름을 불러주는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직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폐기하고 아버지라는 책임을 수락함으로써, 비로소 잃어버렸던 자신의 진짜 이름을 되찾는다.


세상의 모든 거대 담론과 이념적 언어가 무너져 내린 자리에서, 한 인간을 구원하고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것은 가장 작고 사적인 관계의 언어라는 것, 이것이 영화가 도달한 윤리적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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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 지속되는 싸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제안하는 ‘끝없는 전쟁’을 살아가는 방식은 새로운 무기나 전략이 아닌, 새로운 언어를 발명하는 것이다. 퍼피디아가 딸에게 남긴 마지막 유산이 혁명 강령이 아닌, 자신의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아날로그 편지였던 것처럼 , 영화는 가장 사적인 언어야말로 가장 정치적일 수 있음을 역설한다.


윌라가 마지막에 오클랜드의 시위 현장으로 향하는 것은, 어머니의 실패한 혁명을 되풀이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로부터 배운, 이념의 구호가 아닌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현재의 책임을 다하려는 새로운 세대의 응답이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파산한 언어의 잔해 속에서 길을 잃은 인물들을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낡은 암호를 외울 것인가, 아니면 눈앞의 사람을 향해 그의 이름을 부를 것인가.


혁명은 끝났지만 싸움은 계속된다. 다만 이제 그 싸움은 광장이 아닌,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 사이의 호명 속에서, 가장 작은 언어의 윤리를 지켜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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