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령지에서 처음으로 을지훈련이라는 걸 받던 때의 일이다.
'을지훈련'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행사가 지금은 많이 간소화됐지만, 30여 년 전 그때는 상당히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게다가 나는 그 훈련 담당 부서 소속 직원이었으므로 훈련 일주일 전부터 윗분들을 도와 상황실을 꾸미고 자료를 만드느라 제법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철딱서니 없던 신규 공무원이었던 나는, 모든 게 보안인 그 행사를 진행하며 무슨 중요 작전의 비밀 요원이라도 된 것처럼 살짝 흥분하기도 했다.
드디어 을지훈련이 시작되었고 전 직원이 A조와 B조로 나뉘어 정말 전시 상황처럼 훈련했다.
근무조는 원래 근무처에서 일상적인 업무를 봤지만, 상황조는 5층 상황실에 갇혀서 이 공개적인 공간에 풀어놓을 수 없는 갖가지 일을 해야 했다.
그 갖가지 일 중 하나는 상황실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었다.
문제는 을지훈련 3일 차 늦은 밤 상황실에서 발생했다.
밤을 새우려니 출출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해서 음식을 주문해 먹으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씨, 노래나 한 곡 뽑아 봐.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한 계장님이 지목한 **씨는 바로 나였다.
'아니 계장님. 뜬금없이 왜 절 지목하시나요?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내가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그분이 말했다.
행사 담당 부서에서는 그 행사에 참석한 직원들이 지루하지 않게 할 의무가 있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다.
내가 머뭇대는 사이에 "노래해! 노래해!"가 쏟아졌으므로, 거기서 더 뺏다간 분위기를 망치는 주범이 될 것 같아 나는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노래를 부를지 고민하던 내 눈이 어느 분과 딱 마주쳤다.
발령받고 처음 인사를 드리는데, 검정 두루마기가 너무나도 잘 어울렸던 대학 교수님과 무척 닮아서 날 놀라게 했던 타 부서 과장님이었다.
대학 시절, 고전시가론이었나 그런 비슷한 과목 수업 시간에 들어오신 교수님의 멋진 모습에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기품이 뚝뚝 떨어지는 검정 두루마기, 은갈치색으로 빛나던 머리칼, 강단이 느껴지는 표정, 그리고 손에 들려있던 책보자기...
마치 개화기 신지식인처럼 근사한 모습에 한 학기 동안 펼쳐질 낭만적인 수업을 상상하며 마냥 마음이 부풀었다.
하지만 막상 강의가 시작되자 그 낭만은 다 날아가 버렸다.
중후한 외모와는 다른 가느다란 목소리와 빠른 말투, 게다가 입주변에 가득 묻어나던 거품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 동심을 산산조각 내 버렸던 슬픈 기억 속의 교수님이지만, 그분만큼 검정 두루마기가 잘 어울렸던 분을 아직도 나는 본 적이 없다.
암튼 중요한 건 그 과장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가 부를 노래를 정해버렸다는 것이다.
진주난봉가.
왜 그 노래가 불쑥 떠올랐는지 나도 모르겠다.
진주난봉가는 대학 시절 읽은 어느 소설에서 여러 번 반복해 나오기에 호기심에 찾아 배웠던 노래다.
일반 가요보다 민중가요가 더 많이 불렸던 시대였고 게다가 계속 같은 음이 반복되는지라 가사만 외우면 됐으니 그 노래를 배우는 일은 말 그대로 식은 죽 먹기였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시어머니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신댔으니
진주 남강 빨래 가라
아직 서른이 되기 전의 나이라 그랬는지 그 긴 가사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노래가 너무나도 길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너무나도 단조로운 곡이 반복된다는 점.
부르면서도 하품이 나는데, 듣는 사람은 오죽했을까?
처음에는 낯선 노래에 대한 호기심으로 날 바라보던 사람들 얼굴에서 권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노래를 끝까지 불렀는데, 왜 중간에 노래를 그만둘 생각을 못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기만 하다.
며느리가 아홉 가지 약을 먹고 목매달아 죽은 뒤 낭군님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내 이럴 줄 왜 몰랐을까 한탄하고, 뭘 잘했다고 다시 꽃과 나비로 태어나 청산에서 살아보자고 외치는 그 지난한 서사를 나는 끝까지 읊어댔다.
동그랗게 모여앉아 지루한 내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을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대학 시절 국문학과라는 과의 특성 때문인지 창을 할 줄 아는 학우가 몇 있었다.
무슨 과목이었는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는데, 어느 강의 시간에 한 학우가 노래를 부르게 됐다.
그런데 그 학우 입에서 나온 노래가 뜻밖에 창이었다.
주섬주섬 일어나 적벽가였나 춘향가였나 심청가였나 아무튼 창을 부르는데, 마치 그 상황을 예상하기라도 했듯 모든 게 갖춰져 있었다.
하얀 모시옷을 입은 그 학우 손에는 부채까지 들려있었고, 구성진 목소리에 맞춰 부채 춤사위가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 고요함 위로 눈부신 여름 햇살이 쏟아지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한번쯤은 나도 저렇게 멋지게 창 비슷한 것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마음속에 숨어있었나 보다.
그러다 검정 두루마기를 연상시키는 한 인물로 인해 그 욕망이 불쑥 튀어나왔던 것 같은데, 잘못이라면 그 장소가 을지훈련을 하던 5층 상황실이었다는 점일 것이다.
진주난봉가는 아무런 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