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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Oct 24. 2024

그러다 대치동으로 上

어느 삼수생의 회고록 9

글이 좀 지루한 듯해서 바로 삼수 이야기로 점프합니다. 두 번째 입시는 원서 영역의 실패라고, 그리고 그건 엄마 탓이라고 딸아이가 그러더군요.


반쯤 삼수의 길로 다가섰을 때 설날이 찾아왔다. 가장 걱정되는 순간이었다. 평소 같아도 친척들이 다 모이는 자리는 부담스러운데, 하물며 지금은 잔소리를 듣기에 최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그냥 집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 때문에 강제로 할머니 집에 끌려갔다.


가서 잔소리는 의외로 별로 안 들었다. 오히려 내년에 더 잘해보라는 식의 덕담을 많이 듣고 왔다. 조금이라도 쓴소리 했다간 뒤집어질지도 모르는 분위기를 실감해서 사렸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이런 추측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나를 보는 친척들의 눈빛에서 일종의 측은지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렇고, 원서 영역 3패가 기정사실로 된 상황에서 신세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고속성장 제작자가 만든 자료를 본 뒤, 내가 삼수생으로 전직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수긍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딱 하루였다. 그 하루가 지나자 나는 재수 선언을 했던 작년처럼 자연스럽게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독재를 1년 더 다니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렇게 판단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자유였다. 나 자신을 너무 맹신했던 탓에 학습법에 대한 최소한의 점검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인강을 많이 듣고 교재를 많이 풀면 실력도 많이 오를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한 탓이었다.


그렇게 재종을 가려니 선택지는 시대 아니면 강대였다. 이 정도 성적으로 소위 입구컷을 당할 리는 없었다. 그렇다면 소위 메이저 재종을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아니 거리 문제가 있으니 이유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엄마도 자신의 선택으로 나를 쌩삼수의 길로 몰아넣은 데 대한 죄책감이 들었는지 재종을 보내는 데 반대하지는 않았다.


한 달 전만 해도 연세대 입시 요강을 찾아봤던 내가 이제는 학원 입시 요강을 찾고 있었다. 보니까 불행 중에 다행인 점이 하나 있었다. 내 수능 성적이 강대 반액 장학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었다. 하긴, 연대에 무난히 들어갈 점수로 반수도 아닌 쌩재수를 하겠다고 학원에 올 학생이 그리 많지는 않을 터. 다만 돌아갈 곳이 없는 내 처지가 서글플 뿐이었다.


일단 내 마음은 시대로 기울었다. 교통이나 학원비 같은 현실적 요건만 따졌을 땐 강대가 더 나은 선택이었지만, 이과는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자고로 N수란 가슴이 시키는 것, 현실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은 N수를 선택하지 않는 법이다. 현실을 따질 작정이었으면 진학사 칸수를 3합 20으로 맞추는 한이 있더라도 삼수의 가능성을 아예 0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만 교통 문제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졌다. 집에서 강남역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어서 강대까지 다니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만약 시대를 가겠다고 하면 일이 커졌다. 강남역에서 다시 버스를 환승해서 대치동까지 가야 했다. 지하철 같은 다른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환승을 두 번이나 해야 했다. 왕복도 아닌 편도로 100분씩 걸리는 건 덤이었다.


머리가 선택한 강대와 가슴이 선택한 시대. 둘 중 최종적으로 어디를 갈지는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접수 마감이 빠른 시대부터 원서를 냈다. 다음 날인가 바로 시대에서 보낸 합격 문자를 받았다. 다행히 30% 장학금 수혜 대상이기도 했다. 역시 연대 갈 성적으로 시대를 가게 생긴 내 상황이 별로 일반적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어느덧 시대인재 OT를 갈 날이 되었다. 일부러 여유롭게 두 시간 먼저 집에서 나왔다. 강남역으로 가는 빨간 버스에 타자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앉아서 핸드폰을 켰다. 딱히 할 짓이 없었던 나는 입시 카페에 쓴 글 목록을 찾아봤다.


대부분 뻘글이었다. 미기확 세대 끝물로서 그 미기확이 미적/기하(심지어 미기확 시대 때는 벡터까지 있어서 기벡이었다)/확통이라는 선택 과목으로 분리됐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식의, 라떼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도 있었다. 그중에 꾸준 글이 하나 있었다. 매일 다른 동물 사진을 올리며 거의 한 달을 꾸준히 썼던 수의대 기원 글이었다.


이전에 내가 원서를 낸 수의대 추가합격 현황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그때 예비가 3번까지 빠졌던 걸로 기억한다. 한 번 더 봤을 때도 그대로 3번까지였다. 어쨌거나 다 지난 일이었다. 나를 받아주는 곳은 시대와 강대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어느덧 버스는 한강을 지나 강남으로 가고 있었다. 버스가 강남역에 정차하자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승객이 우르르 하차했다. 다른 사람들은 강남역 자체가 목적지인 듯 횡단보도를 따라 걸어갔지만, 나는 중앙차선 버스정류장에 그대로 서서 대치동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생각해 보니 여기서 몇 분만 걸어가면 강대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시대였으므로 420번 버스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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