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삼수생의 회고록 8
어느 순간부터 어질어질한 느낌이 들었는데, 진짜 어지럼증이 시작된 것인지 아니면 과도한 긴장감이 해소된 탓에 그렇게 느껴진 것인지는 몰랐다. 어쨌든 간에 다리 근육도 쓸 겸 해서 교실 밖으로 나갔다.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람들은 벌써 수능이 끝난 분위기였다.
아직 수능이 끝나지 않은 나는 금방 교실로 돌아왔다. 참 신기한 게, 복도는 그렇게 시끄러운데 문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조용했다. 제2외국어를 고사장 분위기 때문에 선택한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나 싶었다. 자리에 앉아서는 지학 필기 노트를 잠깐 보다 집어넣었다. 수학 자료는 아예 안 들고 와서 어쩔 수 없었다.
예비령 소리와 동시에 다른 사람들은 공부하던 것을 치우러 나갔다. 그 사람들이 모두 착석하고 10시 20분이 되자 감독관은 OMR 카드를 나눠줬다. 노란색 종이 위에 하늘색으로 글씨가 인쇄된 그 카드였다. 거기에 인적 사항을 적는데, 국어 시간 때만큼 떨리지는 않았다.
이후 시험지를 받았다. 이번에도 파본 검사라는 명목하에 문제를 훑어보았다. 난이도는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문제를 풀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시간이 남아도는 게, 이번 수능은 쉽게 출제된 듯했다.
20번을 제외한 객관식을 다 해치우고, 주관식 파트로 넘어갔다. 역시 우려했던 만큼 어렵지 않았다. 그나마 걸리는 게 확통에서 출제된 29번이었는데, 그마저도 문항 자체의 어려움보다는 확통 특유의 불확실성에서 기인한 불안감이었다. 30번은 솔직히 28번보다도 허무하게 풀렸다. 이렇게 쉬운 주관식 파트를 가볍게 넘기고 다시 20번 문제를 보았다.
선지는 8, 10, 12, 14, 16으로 5개였다. 그때 나는 답은 무조건 2의 n승 꼴이라고 직감했다. 풀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문제 유형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8 아니면 16, 즉 1번 아니면 5번일 터였다. 나는 둘 중 하나를 찍었고, 이내 다른 하나로 답을 고쳤다. 이렇게 수학 영역은 깔끔하게 마무리했다. 너무 깔끔해서 오히려 걱정이었다. 1컷 100이라는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을까 싶어서.
점심은 작년과 똑같이 샌드위치와 커피였다. 한 손에는 샌드위치를 들고, 다른 손에는 지구과학 필기 노트를 넘겼다. 왜 하필 지구과학이었냐면, 일단 영어를 그 시간에 공부하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인 전략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1컷만 넘으면 되는 과목을 굳이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물리와 지학 중에선 아무래도 지학이 더 암기의 효율적이지 않은가. 뭐 그렇다. 어쨌든 열심히 필기 노트를 훑어보며 점심시간을 보냈다.
3교시가 시작될 무렵에는 긴장이 많이 풀려 있었다. 보케리니의 미뉴에트가 듣기 방송에 앞서 흘러나오는 동안, 나는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평가원 모의고사를 칠 때마다 듣던 그 안내 방송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음악이 끊기자, 비로소 지금이 수능 시간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점심 먹으면서 같이 마셨던 커피 탓인지 졸리고 무기력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90점 맞으나 100점 맞으나 똑같이 1등급인 영어 시간에 컨디션이 최상이라는 점이 아쉬울 정도였다. 국어 시작 전에 커피를 미리 마시지 않았던 게 살짝 후회되었다. 한국사야 원래부터 쉬어가는 시간이었으니 무난하게 넘어갔다.
한국사 영역이 끝난 뒤 감독관은 시험지만을 걷어갔다. 대신 탐구 영역 시험지를 나눠줬다. 종이 뭉치 사이에서 내가 응시할 과목의 시험지를 골라내는 과정 중에 물리 4페이지를 슬쩍 훑어보았다. 할 만해 보였다. 그리고 이번 물리는 실제로도 어렵지 않은 시험이었다. 물리를 풀면서 시간이 여유롭게 남았던 것은 정말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험지 교체 후에 제2 선택 과목 시험이 시작되었다. 지구과학은 1페이지에서 오답률 TOP 문항이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과목이라고들 했는데, 이번에도 1페이지부터 헷갈리는 문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주계열성에 탄소가 존재하냐는 선지(아마 3페이지 후반부에 있었을 것이다)는, 이 불명확성에 화룡점정을 찍었다. 1세대 별이 아닌 이상에야 탄소가 아예 없기는 힘들다는 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근거의 전부였다.
4페이지가 그나마 작년 수능에 비해 평이해서 그런지 30분을 꽉 채워서 시험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4교시가 끝난 후, 많은 사람이 포기 각서를 쓰고 퇴실했다. 제2외국어를 치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세 명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5교시 감독관으로는 고2 때 일본어쌤이 들어오셨다. 시험이 끝나자 일어쌤은, 근황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나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며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셨다.
이번에도 부모님은 차 안에서 대기 중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이번 시험은 어땠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국어 가채점표를 못 썼다고 하자 기억나는 대로라도 채점해 보라고 했다. 공개된 시험지를 pdf 파일로 보며 하나씩 답을 입력한 뒤, 결과보기 버튼을 클릭했다. 84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