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탠저린>을 봤다. 관람전에는 아이폰으로 촬영했다는 것 외에는 영화의 어떤 정보도 알지 못했다. 최초 관람후에 영화에 대한 생각은 단순했다. ’탠저린(껍질이 잘 벗겨지는 작은 귤)’이란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성소수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 것이었다. 그들의 신체의 성(姓)과 그들이 원하는 성(姓)이 다르다는 것, 거친 말과 행동을 연발하지만 그녀들은 친구를 생각하는 우정을 전제로 갖고 가는 등의 양면성이 ‘탠저린’이 가진 껍질과 과육이라는 양립되는 것과 매칭됐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의 삶을 바라보는 것과 대중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의 균형, 균일함이 좋았다. 이것이 영화 관람평의 전부었다.
모임의 영화로 <탠저린>이 선정됐을때 ‘많이’ 당황스러웠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탠저린>과 함께 선정된 공포 영화는 관람후 영화를 복기하는 것이 개인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사실상 정답은 하나인 상태에서 다시금 <탠저린>을 다시 관람했다. 그리고 다시 본 극에서 눈에 보인 감정은 ‘부재’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택시 운전기사(라즈믹)이 첫번째로 태운 할머니가 들고 탄 비어있는 케이지 때문일 것이다. ‘알피’라는 개의 이름까지 설정까지 했으면서 할머니는 왜 빈 케이지를 들고 택시를 타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 장면을 보며, 텅 빈 공간, 부재, 공허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보다 먼저 언급해야할 것이 있다. 그것은 극 <탠저린>에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에너지다. <탠저린>의 시작은 ‘도넛타임’이라는 가게에서 시작된다. 그안에서 모인 두 여인(?)이 흩어지고 그와 관계되는 인물들이 욕구(혹은 타인과 결합된 욕망)를 풀어내려는 과정에서 인물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응축된다. 이들이 갖는 ‘욕구/욕망’은 여러 가지이며, 이것을 구성하는 감정의 바탕에는 분노, 욕망, 질투 등이 있다. 또한 이것은 성적 소수자로 인지되는 인물과 그들이 처한 상황, 그 감정들이 현재 그들의 관계를 깨뜨리려는 행위와 연동되어 관객에게 ‘불편한’ 감정을 발생시킨다.
후반 극을 보면 인물들이 집결된 ‘도넛타임’ 매장은 아비규환이라는 표현이 적절한 정도로 아수라장이 된다. 심지어 그들이 싸우는 날은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며, 그 매장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적 소수자, 미국LA라는 지역에서 모인 동양인, 아르메니아인, 흑인이라는 다양한 인종의 이민자들이다. 다른 점이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며, 욕구를 채우기 위해 행동한다. 그리고 그 매장에서 하루동안 생성해 내재한 에너지를 그 가게에서 모두 다 쏟아낸다. 그 후에 등장 인물들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인가? 에너지는 생성됐고, 추후 매장에서 쏟아졌지만, 에너지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되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것, 자신의 성욕을 해결하는 것, 사위의 약점을 밝혀내는 것’의 에너지(욕망,감정)이 사라진 것은 맞으나 그 에너지를 담고있던 ‘감정의 공간’은 남아있다. 그것이 인물들에게 공허, 부재로써 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화의 소동극이 종료된 후 나타나는 ‘번 아웃’현상일 수 있다.
주인공 또한 이 감정을 담는 공간의 부재 (혹은 번아웃증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그녀들은 ‘도넛타임’후 신디는 배신감, 알렉산드라는 당혹스러움(수치)을 느꼈을 것이다. 다시금 감정의 공간에 관객에게 불편함을 유발하는 에너지가 차오려는 순간에 그녀들에게 하나의 사고가 생긴다. 그 사고를 해결하기 위해 들어간 코인세탁소에서 그녀들은 화해를 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그녀들에게 세탁소 안에서의 감정은 극초반에 생성되는 맹목적인 성향의 감정과는 다른 것이며, 그것이 사라지고 난 후에 감정의 공간에 다른 것이 자리 잡았다.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만으로 마무리가 된다. 이 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다채로울 것이다. 그 다채로운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중반의 감정과 다른 감정의 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채로운 감정보다는 동정심과 감독이 (대중이 소수자라 규정짓는)인물에 대한 시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영화를 보며 생긴 동정심이란 것은 상대적인 비교에서 생성된 것이다. 관객은 후반부에 인물들이 타인으로 인해 소외/배제되는 것을 봤다. 이 때 생기는 즉각적인 감정의 대응이 동정심의 주된 것이다. 거기에 최초 주인공의 언어와 행동이 거칠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맹목적인 행동을 했고, 그로인해 관객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생겼다. 하지만 그 후에 코인세탁소에서 손을 잡는 것을 보고 관객은 자신이 갖고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반성 및 상쇄가 됐기 때문에 인물들에 대한 연민을 더 강해졌을 것이다.
이것보다 감독이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호기심이 더 크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 말하는 ‘인간에 대한 위로’와 ‘영화가 인간을 보다듬는 방법’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여주는 것이 과연 그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스스로 내려야하나 확실하게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아직 인간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들의 하루를 담백하게(?) 보여준다는 것에 있어서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가짜로 덧칠되고, 다르게 그려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하게 하루를 표현하고, 오늘의 그녀들의 하루가 내일에 온다해서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영화가 ‘버디무비’라는 개념보다는 ‘소동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에서 관객인 나에게 전달된 감정은 감독이 의도한 설중 중 하나일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 자신을 약간 되돌아보게 됐다. 영화 속에서 인물들에게 ‘불편함’이라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그들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다’라는 일종의 우월감은 아닐까하는 지점에서 말이다. 영화 <탠저린>이 잘 만들어지진 않았다. 그럼에도 다른 영화와 달리 ‘인간의 보여주지 않는 이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혹은 나와 같이 누군가를 되돌아보게 될수 있다는 것에서 괜찮은 영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