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문정 Mar 30. 2022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감상평

01.

<드라이브 마이 카>(2022)를 떠올리면 기억에 남는 몇 장면들이 있다. 이 장면들은 시간이 지나면 이 작품의 이름이 거론되면 떠오르는 장면이 된다. <드라이브 마이카>에 한해서 두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scene1.

히로시마로 내려가는 차안의 가후쿠를 비추며 니시지마 히데토시(西島秀俊)의 이름이 나타나는 장면.

#.scene2.

윤수, 유나, 가후쿠, 미사키의 저녁식사 중 유나가 연극에 참여한 이유를 이야기하던 장면이 그러하다.

#.scene2의 저녁식사 장면 대화는 이상한 기분을 경험했다. 감히 '영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 그 기분의 시작점에는 분명 무성영화의 움직임이 주는 감흥이 있을 테지만, 명확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후 영화를 추가 관람을 했지만 그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놓을 수 없어서 이렇게 글을 써보려 한다. 그 감정이 무엇이며, 무엇을 볼 때 감정이 시작됐는지 진짜로 무엇은 느낀 것은 맞는지 헷갈리는 불리한 상황임에도 말이다. 저녁식사를 하며 이유나(박예림)는 가후쿠에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신의 본래 직업은 댄서였고, 유산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중 남편 윤수(진대연)의 권유로 연극에 지원했다고 말이다. 이 장면의 특이한 지점은 그녀에게 음성이 없으며, 수어(手語)를 모르는 관객은 타인의 음성을 통해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타인의 말을 번역해주는 언어(자막)이 없었다면, 수어를 모르는 상황의 관객은 그녀의 몸짓을 언어라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영화 밖 관객에게 수어와 외국어(음성으로 표현되는 언어)는 동일한 위치를 갖는다. 수어가 영화 속에서 소통이 되는 이유는 남편의 음성을 통해 그녀의 이야기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라 한국인 관람객들이 영화 속 의사소통을 자막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극에서 나타나는 한국어를 포함한 언어 자체의 효율성에 의구심을 갖기 충분하다.

영화의 많은 장면들이 음성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녁 식사 장면은 음성언어의 비중보다 수어의 비중이 높다. 그로인해 수어를 모르는 이들은 윤수가 말해주는 음성이 나오기 전까지 가후쿠의 어깨 뒤에서 그녀를 바라볼 뿐이다. 그녀를 바라보는 짧은 시간 동안 유난히 하얗고 마른 손가락을 가진 그녀의 단정한 모습에서 이유 모를 감정이 생겼다. 다만 이는 윤수가 번역해준 음성에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 이들은 수어와 한국어에 모두 자막이 따라오기 때문에, 한국어를 사용하는 필자는 이질감과 동질감이 동시 생성되는 특이한 현상을 경험했지만 이는 가후쿠가 출연하는 연극에서 생기는 의문이므로 더 이상의 진술을 하지 않겠다. 이보다 더 중요한 지점은 가후쿠에게 새로운 언어가 생겼다는 것이다. 다른 언어를 사용해 연극을 만드는 가후쿠에게 자신의 연극에서 수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새로운 시도이자, 기존에 만들어오던 자신의 연극과 다른 지점이 된다. 바로 음성언어와 비(非)음성언어, 두 가지 언어의 사용이 되기 때문이다.

‘유나’라는 인물이 등장하면서부터, 연극 뿐 아니라 영화 내에서도 흥미로운 설정이 전개된다. 가후쿠에게 유나는 비(非)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며, 가후쿠의 아내 오토는 음성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유나와 오토는 동일하면서도 다른 존재다. 유나와 오토는 가후쿠에게 언어를 활용해 이야기하지만 그에게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다. 유나는 남편 이윤수라는 정거장이 있어야만 소통할 수 있다. 아내인 오토 또한 마찬가지다. 가후쿠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거나 경청할 의지가 없는 것 같다. 그녀의 불륜을 목격하거나 그녀의 소설이야기를 들었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토는 물리적인 죽음을 맞이했으나, 가후쿠의 빨간 차(SAAB)속 음성으로 살아있다. 그녀는 늘 이야기를 멈추지 않는다. 섹스를 하는 중에도/출근하는 길에도/공연을 보러 와서도/ 딸의 제사 날에도 말이다. 심지어 그녀가 없는 차 안에서도 그녀는 계속 음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통해 그에게 이야기를 한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는 장면은 극중에서 두 번 등장한다.(잠이 들거나,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논외로 한다. 그 후에도 대화를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소리가 사라지는 장면은 1. 딸을 위해 제를 지낼 때 2, 칠성장어를 이야기한 다음날, 유스케가 칠성장어를 유투브에서 찾아보던 때이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무 말하지 않고 허공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내 1. "운전이 하고 싶은 날 아냐?" 2. "어제 내가 했던 이야기 생각나?" 라고 남편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그녀의 이름인 오토(おと[音])는 ‘소리'라는 의미인 것을 상기하면 그녀의 소리가 사라지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후 생물학적으로 오토는 죽었으니, 그녀의 소리 또한 꺼져버리는 것이 예상되지만, 그의 ‘빨간 차(SAAB)'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살아있다. 그녀는 그와 “함께 살아가고” 싶었고, 계속 대화를 시도하여 그에게 반응을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유나의 식사장면과는 다르게 가후쿠 유스케와 가후쿠 오토의 이야기에서 보여진 섹스장면은, 유나의 장면과 상반되는 지점이 있다. 오토와 유스케는 병원에서 포옹을 할 때를 빼고는 마주보며 이야기한 적이 없다. 대상과 같은 방향을 보거나, 다른 방향을 보는 방법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가 섹스를 한 후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모두 그녀를 역광으로 비추고 있는 반면, 유나는 이와는 반대로 식탁 위 전등 빛을 하얗게 받으며 마주보며 대화를 한다. 유나가 한국인(외국인)이면서, 음성언어가 아닌 수어를 할 줄 아는 설정은 이 맥락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유나와 오토는 같은 듯 다른 인물로서 가후쿠에게 존재한다.

02.

등장인물들인 ‘오토/가후쿠’, ‘유나/윤수’, 이들 사이에서 공통점이 있다. 오토와 유나는 아이를 잃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도리 없이 살아”간다. 그리고 그녀들은 남편에게 이야기를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어쩌면 유나는 목소리를 잃은 또 다른 오토일지도 모르겠다. 과도하고 강한 어조로 들리겠으나 자꾸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생각을 계속 이어가다보면, ‘죽음’이란 소재에 도달하게 된다. 죽음을 통한 인물의 부재는 가후쿠에게는 자신에게 발생한 현실이었으나,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가후쿠는 아내가 죽고 난 이후 11층에 위치한 그녀와 함께 살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2년 후’라는 설정으로 인해 집의 존재를 관객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관객에게 타당한 이유를 부여했지만, 극중 가후쿠에게는 11층에 위치한 이 집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가 있는 ’그의 빨간 차(SAAB)'가 바로 또 다른 의미의 집이 됐기 때문이다. 가후쿠(家福)라는 이름은 '집안의 행복(幸福)'이란 의미를 갖고 있으며, “가후쿠 오토(家福音)" 라는 의미는 '집안의 행복한 소리'라는 의미라는 지점은 흥미롭다. 이 지점을 엮다보면 그녀의 목소리가 있는 곳이야말로 유스케에게 진정한 집이 된다는 풀이가 성립한다.

유나와 오토는 아이를 잃었고, 그 슬픔을 이겨내고자 두 여인은 이야기를 한다. 한 사람은 이름처럼 목소리로 '뱀처럼 이야기를 뽑아내고', 한 사람은 '몸'으로 말한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가후쿠 유스케가 있다. 그녀들은 그에게 <바냐 아저씨>라는 연극의 대사를 인용해 이야기한다. "살아가야한다고, 그리고 죽음 후 하느님 앞에서 엉엉 울며 힘들었다고 말하라고"말이다. 오토와 유나는 가후쿠에게 만큼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로서 동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가후쿠 유스케는 오토와 자신의 어린 딸이 2001년 2월 25일에 사망하자, 빨간 색 SAAB차량을 구매한 것으로 추정된다. 차량은 15년전 구매를 했고, 죽은 딸은 미타리와 동일한 나이라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딸의 부재를 물리적인 물체로 대체했으나 그것이 감정까지 대체했다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에게조차 운전 방식에 대해 잔소리를 할 정도로 차신의 차량을 소중하게 여겼다. 이후 아내가 죽고 난 이후, 아내의 음성은 여전히 차량에 남아있었다. 그는 아내의 죽음으로 치환된 부재를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로 대체했다. 가후쿠 유스케가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미사키와 설원으로 가기 전까지는 대체를 찾아 채워 넣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그는 청중의 역할을 하며 상황에 개입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 다카쓰키 고지 그리고 연극을 하는 이들의 대사까지도 청취한다. 심지어 오토의 칠성장어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답한 그 날, 오토는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그는 모니터를 통해 칠성장어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변화하는 지점은 윤수/유나, 미사키와 함께 한 저녁 식사이후부터다. 전까지 유스케는 질문하는 것, 연극에 필요한 이야기만을 하는 것 외에 먼저 이야기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돌려주는 것이 전부인 셈이다. 그러나 이 때 그는 불필요한 이야기를 한다. 미사키의 운전실력을 묻는 윤수의 질문에 대답을 길게 한다거나, 타 배우에게 묻지 않았던 힘든 점이 없냐며 유나에게 묻는 장면을 시작으로 유스케는 질문을 시작한다. 그 무렵 그는 빨간 SAAB차량에서 오토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설령 나온다 하더라도 (창문을 열어)밖의 외부 소리에 겹쳐지며 소음형태가 된다. 유나의 아픔을 치유하는 방식이 혹은 그 대화가 유스케에게 변화를 일으킨 것일까. 음성언어가 아닌 (‘손’이라는)형태의 소통이야말로 그를 청중의 위치에서 변화시키는 것일까. 혹은 유나의 아픔을 치유하는 방식 혹은 그 대화가 유스케에게 변화를 일으켰는지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그렇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가후쿠의 입장에서 유사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가 부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위로를 줄 수 없다. 그녀들은 이미 죽었거나, 남편(윤수)라는 이를 통해서만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03.

저녁식사를 기점으로 가후쿠와 미사키의 관계에 변화가 생긴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오토와 유나의 관계같이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들은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타인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을 갖고 있다. 두 사람은 그날의 식사를 마치고 난 이후부터 서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극은 이 시점부터 연극 연습보다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들의 대화 주제는 연극(이야기)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가후쿠의 주변인들은 모두 그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의 주제는 ‘이야기’뿐이다. 오토의 꿈 이야기, 연극의 대사, 연습에 대한이야기 등으로 이뤄진 대화들은 가후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가후쿠 유스케 역시 그 ‘이야기’에서만 이야기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사키 와타리(미우라 토코)와의 대화는 다르다. 그녀는 연극, 그러니까 ‘이야기’로 연결된 인물이 아니다.

가후쿠에게 미사키는 극중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외부인인 셈이다. 히로시마에서 공연할 연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극을 통제하고 만들 이는 가후쿠 뿐이었다. 심지어 다카쓰키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연극의 진행여부조차도 그가 결정해야했다. 미사키는 연극 연습을 본적이 없으나, 유나/윤수와의 저녁식사 이후 그녀가 소냐를 연기할 것이라 생각했으며, 그녀의 연기가 궁금하다고 말한다. 이후 이들은 산사태로 인해 벌어진 가족의 죽음과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칠성장어의 뒷이야기를 알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 함께 듣는다. 이 대화 장면은 가후쿠와 다카쓰키의 음성으로 진행되지만 죽은 딸아이가 살아있다면 23살이 됐을거라는 이야기를 할 때 자동차의 백미러로 가후쿠와 미사키의 시선이 마주친다. 가후쿠는 이내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지만 차량 안에는 두 명의 남성 외 한명이 더 있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다카쓰키가 하차한 후, 이야기를 함께 듣게 된 미사키는 남자의 이야기가 진실일거라 생각한다 말하지만 가후쿠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며 담배를 함께 피운다. 선루프 위로 올라온 향초의 모양을 한 담배의 형상은 ‘감시카메라를 보며 “내가 사람을 죽였다”라고 외치며’ 자신이 존재를 증명하려던 소녀 혹은 그 이야기를 하는 아내에 대한 기억을 추모하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정적이고 감정적인 문장 대신 그저 담배를 태우는 형식으로 가후쿠를 위로한 것이라 장면을 설명하고 싶다. 이후 다카쓰키의 사건이 발생해 두 사람은 운전을 하며 설원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차량 안에서 갑작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두 사람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진 않았으나, 가족의 죽임에 대한 죄책감을 갖고 있다. 그리고 가후쿠는 미사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엄마를 죽였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미사키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무너져버리고, 눈으로 덮여 형태를 알 수 없는 그녀의 집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파고 그 사이에 담배를 한대 꽂아놓는다. 그리고 눈 덮인 길을 올라오려는 미사키의 손을 가후쿠가 잡아준다. 손이 더럽다며 잡지 않으려는 그녀의 손을 그가 아무런 말 없이 잡는 행동은 가후쿠가 미사키에게 해주는 위로의 한 방식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에게 “오토에 대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운”지 물어보자, “오토가 보고싶다” 그는 대답한다. 영화 후반에 이르러 등장하는 인물의 심경고백은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가후쿠는 자신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지 않았”다. 가족의 죽음으로 발생한 부재를 메우기 위해 그것을 돌아보지 않는 선택을 했다. 그에 더해 ‘연극’이라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세계에서는 아내의 목소리가 담긴 테이프가 있었고, 그것을 재생하며 머물 차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족 부재에 대해 말할 이유도,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 공연을 준비하면서 유사한 경험을 한 부부와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연극과 관계없는 인물 미사키를 만났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위로를 받고 또 건넸다. 그런 시간을 겪으며 그는 비로소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그녀는 사라졌지만 말이다.

극 중반에 등장한 식사 장면을 통해 느낀 감정은 아직도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장면을 통해 인물들의 관계가 변형을 시작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 변형의 중심에는 유나가 존재한다. 정확하게는 유나가 사용하는 언어인 수어(手語)가 있다. 그리고 그걸 전달해주는 윤수 또한 있다. 유스케는 새로운 언어의 등장과 유사한 일을 겪었으나 자신과 오토와는 다른 이들을 보며 아내의 죽음을 상기했을지 모른다. 그 떠올림으로 인해 아내의 목소리로 만족하며 살던 유스케에게 변화가 일어나 미사키에게 아내의 이야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추측 일뿐이며, 그에게 일어난 변화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그 원인중 하나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속도가 느린 것을 꼽고 싶다. 느린 속도와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 변화하는 인물의 감정 또한 미세하게 변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내부에는 죽음 혹은 그에 대한 두려움/공포가 내재한다. 이 지점은 감독의 전작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하다. 이 영화에서는 가족을 잃은 이들이 가진 부채감에 대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부채감을 해소하는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들이 호소하는 후회와 슬픔, 부채감은 그들만의 것이라 말하며, 그들이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전글 감독론 : 리산드로 알론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