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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Mar 25. 2022

감독론 : 리산드로 알론소

– 관람객과 감독에게 ‘본다’는 것은



01. 

    리산드로 알론소 감독의 영화들은 흔히 ‘리얼리즘 영화, 슬로우 시네마, 로드무비’라고 불린다. 이처럼 그의 영화는 여러 범주에 속해 있으나 정의 내리기 어렵다. 그 이유는 관람을 하고 난 이후 남겨진 감정과 서사가 뭉치지 않은 채 평행선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건 영화가 관객의 몰입을 요구하지 않으며, 관객과 캐릭터와의 공명을 바라지 않음을 의미한다.

    캐릭터와 관객의 공명, 몰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화’는 무엇일까. 영화라는 텍스트는 세상에 공개됨과 동시에 관객에게 수많은 텍스트로 복제되어 재생산된다. 이건 관객의 공명을 불러일으킨 대가이며, 그로 인해 영화라는 텍스트는 오래도록 살아남는 생명력을 갖는다. 하지만 리산드로 알론소는 작품의 영원성을 바라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감독의 바람이 ‘슬로우 시네마 · 리얼리즘 영화’ 범주 내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위치의 배경이다. 무엇을 위해 감독은 이와 같은 선택을 했는지 살펴보고 싶다. 

   이 글에서는 <죽은사람들>과 <판타스마>,<도원경>을 중심으로 감독의 세계관을 살펴보려한다. 


02. 보이는 것을 통한 이야기와 관객과의 거리  

    영화 <도원경>은 극 후반에 관객에게 “무엇이 삶을 가동시키고 나아가게 할까?”라는 내레이션을 들려준다. 그 직후 비뵈르크(장교 군나르의 딸 잉게보그와 동일인물)가 등장하며, 장난감을 호수에 던진다. 눈에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면, 아버지(장교 군나르)는 딸을 위해 벌판을 떠도는데, 딸로 추정되는 여자는 아버지가 찾은 인형을 버리는 셈이 된다. 이로 인해 노파가 던진 내레이션 속에 숨겨진 의미는 약화된다. 비뵈르크가 던진 인형은 장교 군나르에게는 딸을 찾는 실마리인데, 인형을 던져 호수에 버림으로서 그녀 스스로 아버지에게 돌아가길 거부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 장교 군나르가 갖는 삶의 의지는 호수에 던져지는 꼴이 된다. 

    그렇다면 행동과 언어를 통해 의미를 쇠락 시킨 영화를 통해 관객은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이 영화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관객이 알 수 있는 명징한 지점은 ‘영화(프레임)를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에서 의미·스토리 등의 명확한 인과관계는 성립되지 않아도 무방하다. 이는 관객이 프레임을 통해 보는 영화는 그 자체로 자기완결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는 영화 속 ‘보이’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는 ‘보이는 것’을 통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시에, ‘보이는 것’을 통해 관객과 거리를 만든다. 일례로 <도원경>의 화면 비율은 ‘1.33:1’로 채택했으며, 동시에 프레임의 모서리 부분이 둥글게 처리됐다. 이것은 화면의 모습 그대로가 망원경으로 보는 장면과 동일한 인상을 관객에게 주기 위한 고의적인 선택이다. 관람자가 망원경 형태의 프레임을 통해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람형식을 선택함으로써 감독은 프레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관람객 사이에 거리감이 생성되길 원했다. 이런 ‘거리감’은 관객과 캐릭터의 공명을 차단하는 효과와 동시에 관객은 그 사이 쌓인 생각과 감정을 오롯이 혼자 소유하게 된다. 상업영화와는 다른 이런 불친절함은 낯설다는 감정으로 치환되고, ‘도원경’이라는 낙원과의 거리가 생성하게 된다. 

    감독의 영화는 관객과 거리를 둠으로 인해, 스스로 닫히고 폐쇄된 공간으로 존재하지만, 영화(스크린)를 보고 있노라면 동일한 소재 등이 개별 영화를 왕래 하고 있음이 보인다. 관람직후 이스터 에그(Easter Egg)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것은 재미만을 추구하지 않으며 이는 관객에게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다른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이것은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의 영화 세계관을 구축함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다. 이들은 서사에 막대한 영향을 주지 않지만, 반복적인 등장을 통해 관객에게 감독의 영화들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는 이미지를 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감독이 작품을 ‘보여주는’ 소통 방식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법이기도하다. 


03. 반복적인 인물의 등장으로 연결되는 세계 

    ‘영화는 내용이 아닌 형식이 중요하다’던 앙드레 바쟁의 말을 비틀어 인용하자면, 리산드로 알론소 감독의 작품들은 “텍스트들의 내용 대신 그 안에 놓인 소재를 통한 연결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것들을 발견해 연결하면 다른 세계가 완성된다. 

    감독 세계 속에 반복 등장하는 소재를 따라가 보면, 영화 <판타스마>는 감독세계에서 특이한 위치를 선점한다. 이 극은 출입하는 사람만이 존재하는 닫힌 공간을 배경으로 하며, 이 공간에는 앞서 공개된 두 작품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자유>의 주인공이자 <판타스마>에서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등장하는 미사엘과 <죽은사람들>의 주인공 아르젠티노 바르가스이다. <판타스마>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죽은사람들>을 보러온 남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아르젠티노 바르가스가 등장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자유>의 주인공 미사엘이 등장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는 극장 안에서 타인과 대화하지 않고, 마주치지도 않은 단절된 상태로 배회를 하는데, 그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관객뿐이다. 어쩌면 미사엘이 판타스마(Fantasma), 즉 ‘유령, 환영’일지도 모른다. 

    이 인물이 등장하는 이유에는 세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첫 번째 가설은 미사엘, 아르젠티노 바르가스. 두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이름만 다를 뿐, 한 사람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라 해도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점을 갖는다. 이들은 나무를 다루며, 동물을 살육했으며, 누군가를 찾는 과정을 겪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동일인이라는 가정을 해보자. <자유>의 미사엘이 결혼을 하고,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서 출소한 이후의 일이 <죽은사람들>인 것인가 라는 생각까지 뻗어 나갈 수 있다. 더불어 미사엘이 과거에서 온 인물이기에 현재의 아르젠티노와 그 외의 등장인물들과 마주치지 않는 확률도 있다. 실제 아르젠티노는 등장하는 인물 모두와 마주쳤으나, 미사엘은 아르젠티로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두 명의 관계에 대한 것이며, 동일인이기에 <판타스마>에 출연한다는 것에 대한 이유는 될 수 없다. 또한 감독은 캐릭터가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므로 성립할 수 없는 가설이 된다.

     두 번째 가설은 영화 <판타스마>의 배경인 ‘극장’에는 영화 속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상상력은 수도꼭지를 열거나, 승강기를 닫지 않아 경고음을 내는 등의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는 미사엘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설정에서 시작된다. 또한 실체가 있는 아르젠티노는 <죽은사람들>의 상영이 종료된 후, ‘후면무대 혹은 촬영현장(Escenario)’이라 적혀진 문을 열어 그 안을 바라 본 후 사라진다. 이 장면은 아르젠티노가 다시 캐릭터의 삶(환영, 유령)으로 돌아가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며, 이후에 아르젠티노 역시 미사엘과 마찬가지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세 번째 가설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미사엘과 아르젠티노 바르가스가 주연한 영화의 배경인 ‘숲’과 동일한 성질을 가졌다는 것을 바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숲과 극장’은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며, 떠나거나, 나가는 사람이 없는 한정된 공간으로 등장한다. 만약 감독이 형태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을 갖는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를 미사엘에게 허락했다면 이는 충분히 설명된다. 

   <자유>의 미사엘과 <죽은사람들>, <판타스마>의 아르젠티노 바르가스는 <판타스마>라는 세계로 이동이 자유롭다. 그러나 영화들 사이도 오가는 그들은 <판타스마>의 영화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여기서 그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일까, 않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발생한다. 필자는 나가지 않는 것이라 답하고 싶다. 이들은 떠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 속 인물과 분리되어 또 다른 자아를 갖거나 그와 반대로 다시금 극 중 인물이 될 수 있는 공간인 ‘극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 이 공간을 떠날 이유는 그들에겐 없다. 여기의 그들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영화 <도원경>은 한 편의 영화 내에서 분리된 세계를 오가는 캐릭터의 이동 형태를 보인다. 다만 영화 속 아버지는 딸 잉게보르를 찾지 못했기에 결코 그 세계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잉게보르(비뵈르트)는 사랑하는 꼬르또가 죽었기에 그 세계에 머물 이유가 없어졌기에 떠났다. 그 이후 그녀는 현대 시점의 세계로 이동한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비뵈르트(잉게보르)가 <도원경>이라는 세계 내에서 이동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04. 반복적인 소재의 등장으로 연결되는 세계 

    리산드로 알론소 감독 작품에는 캐릭터이동 뿐 아니라 소재 또한 이동을 한다. 이 소재는 등장인물보다 자유롭게 등장하여 관람자의 시선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로 인해 감독의 영화들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게 된다. 

    극 <도원경>에는 극 <판타스마>에서 사라진 개가 등장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이 개는 <판타스마>의 극 초반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간 후 사라졌다. 추측컨대 이 사라진 개는 <도원경>의 세계로 넘어가 아버지를 노파에게 데려다 줬을 것이다. 이 동물은 <판타스마>에서 아르젠티노 바르가스가 1층에서 승강기를 탈 때 함께 동승한다. 이 때 눈여겨볼 지점은 승강기를 탄 주인공이 문이 닫히길 기다리는 순간, 인물 옆에 검은 그림자가 보이는 것이다. 이 그림자를 유심히 보면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이 보이지만, 개의 실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이후 개와 아르젠티노가 승강기에 탄 후 화면에는 타이틀 <Fantasma>라는 글씨가 나타난다. 이후 관객의 시야에 보인 것은 한 마리의 개가 홀로 나타나 계단 아래로 내려간 후에 미사엘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앞서 <판타스마>에 등장한 <자유>의 미사엘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는 점과 개의 등장이 유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동물 또한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건너온 캐릭터이며, 영화 <판타스마>에서는 일종의 유령, 환영과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이 개는 <도원경>의 노파와 비뵈르크의 애완견으로 다시 등장한다. 물론 <도원경>속에 등장하는 두 마리의 개가 동일한 것인지에 대해 알 수 없다. 다만 급성습진이라는 피부병의 상흔을 봤고, 관리인은 비뵈르크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고 말한 것을 들었기 때문에 이를 토대로 두 마리의 개는 서로 동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심지어 <죽은사람들>에서 아르젠티노는 식료품을 사서 매춘부를 찾아가는 길에 타인의 집 마당에 묶인 개의 목줄을 풀어주고 먹이를 준다. 마당에는 몇 마리 동물이 있었으나, 오로지 목줄이 메어진 한 마리의 개에게만 음식을 준다. 고백하자면 <판타스마>에 등장한 직후 사라진 개 또한 <도원경>에 등장하는 개와 동일한지에 대해 답변할 수 없다. <죽은사람들>에 등장하는 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이 동물이 <판타스마>라는 공간으로 이동한 캐릭터이자, 유령이라 말하는 편이 신빙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 <판타스마>, <도원경>에 등장하는 개가 똑같은 생명체인지에 대한 물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세계를 잇는 매개체이자 극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타내기 위해 선택된 재료일 뿐이기 때문이다. 감독에게는 ‘개’라는 종(種)의 등장이 필요했다는 것과 그것을 관람객이 보게 만들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에게는 유사성을 가진 소재 등장으로 인해 각기 다른 영화들이 서로 연결됐다는 구심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05. 관람을 관람하는 체험을 통해서(1) 

    작품 <판타스마>의 아르젠티노는 문을 통해 어디론가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죽은사람들>의 아르젠티노 또한 천막 사이로 사라진다. <자유>의 미사엘은 누군가 만나는 것을 실패하고, <도원경>의 아버지는 딸을 발견하지 못하고 광야를 헤매며 사라진다. 이렇듯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캐릭터들은 관객의 시선에서 보이는 것을 포기한다. 또한 관객의 입장에서는 정보를 습득하고 추측·판단해야 할 대상이 사라져버린다. 이런 상황을 만드는 감독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의 영화는 여전히 ‘본다’라는 것을 통한 정리만 될 뿐 정의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보는 것’을 포기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유일하게 인물들을 알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의 주체는 ‘나’지만, 보여줄 대상을 선택하고, 스크린에 담는 역할은 카메라가 한다. 이 카메라는 스크린 속에서 혼자 자리를 잡고 화면 안의 모든 것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찾아 헤매는 인물’과 ‘광활한 대지와 울창한 숲과 강의 풍경’을 거리를 두며 바라보는 행위는 마치 인물의 여정이 동일한 장면의 반복인 것 같은 인상을 만든다. 이로 인해 캐릭터는 계속 이동하지만, 정작 관객은 그가 서있는 장소를 알 수 없는 현상을 경험한다.

    여기에서 인물을 통해 눈여겨 볼 지점은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의 영화 속에서 시간이 정확하게 명시되는 지점은 <죽은사람들>에서 ‘2003년 11월 13일’에 코리엔테 형무소에서 바르가스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는 시점뿐이다. 감독의 데뷔작인 <자유>에서 수미상관형식인 오프닝과 엔딩 장면이 동일하지만 동일한 시간인지 알 수 없다. 같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일 뿐, 같은 시간인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원경>에서 아버지가 딸을 며칠을 찾아 헤맸는지 낮과 밤의 경계는 불분명하고, <리버풀>에서 배는 목요일 출항을 하고 이틀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주인공 파렐은 벌써 삼일 밤을 보냈다. 

    이렇듯 영화 속에서 카메라의 시선으로 인해 인물이 서 있는 장소가 사라지고, 목적과 목표의 실패로 인해 인물이 사라지고 이내 시간마저도 그 경계가 흐릿해진다. 그때 감독의 작품들 안에서는 시공간이 분리되어 기묘하고 신비한 감정을 발생시킨다. 이 장면들은 관객의 ‘영화적인’ 체험을 위한 것이며, 이것이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가 영화의 서사와 감정을 분리하는 이유일 것이다.


06.  관람을 관람하는 체험을 통해서(2)

    <판타스마>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관람한다. 이 장면을 통해 감독 리산드로 알론소와 관음증을 연결 지었다. 그러나 스크린을 바라보는 인물과 상영관 안의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관음증적 시선을 통해 즐거움을 얻고자 한 사람은 ‘나’(관람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감독은 관음을 통한 몰입과 그에 대한 영화적 체험 대신 관객과의 의절을 선택했다. 그 의절(거리두기)을 통해서 관객은 영화를 보려고 앉은 캐릭터와 함께 스크린 속 영화를 본다는 동질감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 때 관객은 극장에 들어서면 늘 스크린만 바라보는 관람객인 자신을 객관화하여 바라보게 되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은 영화를 관람하는 행동이 아닌, ‘관람을 관람한다.’는 행위로 전환된다. 이로 인해 기묘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만큼은 관객이 판타스마(유령)라고도 할 수 있다. <판타스마>의 상영관 안에 있는 세 명의 인물에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다른 영화들을 관람할 때에는 해당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판타스마>의 상영관 장면처럼 감독은 각기 다른 체험을 관객에게 공유한다. <도원경>에서 노파와 만나는 동굴 장면은 신비하고 오묘한 감상을 하게 된다. 이 감상은 노파의 행동과 대사로 시작된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라고 물으며 딸의 나침반을 아버지에게 돌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인해 노파가 딸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또한 아버지와 노파의 만남은 그 장소가 어디인지, 시간이 얼마나 지난 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 만남은 아버지가 뒤를 다시 돌아본 순간 노파가 사라졌기에 꿈 일수 도 있으며, 이렇게라도 딸이 어딘가 살아있으리란 그의 환상(희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대위가 밤에 잠을 청한 것은 딸이 떠난 날과 그 다음 날(전쟁무도회가 열리는 날)뿐 임으로 실상 <도원경> 세계의 시간이 그리 많이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감독은 시간, 장소의 경계를 사라지게 했고, 인물의 행동을 통해 관객에게 신비한 체험을 선사 했지만, 결국 그 인물마저도 화면에서 사라지게 했다. 

    동굴과 상영관의 장면은 모두 이질적이고 기묘하지만, 관객의 마음 한곳에 남게 된다. 관람이 아닌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런 장면들이 영화 관람을 종료한 후에 인상에 남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자유>에서 오프닝과 반복되는 듯 보이는 엔딩 장면에서는 공포를 느끼는데, 이는 미사엘과 관람객이 눈과 마주치기 때문이다. 오프닝부터 관객은 자신의 존재는 들키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고 영화를 봤다. 이건 <판타스마>의 유령, 환영이라는 위치와 동일하다. 그러나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관객의 위치(판타스마)에서 작품의 등장인물과 같은 위치를 부여받는다. 미사엘은 어쩌면 카메라의 존재를 알아 차렸을 수도 있다.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친 관객에게는 이 또한 하나의 체험이 된다. 그러나 앞 선 두 영화는 관람객인 나의 안전을 보장받은 기분이었으나, <자유>에서는 안전을 보장하지 않았다. 이는 감독이 영화를 보는 관람형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죽은사람들>의 마지막 시퀀스는 오랜 시간 바닥에 놓인 목각 인형을 화면에 보여준 채 지저귀는 새 소리가 들리고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단순하게 보자면 평온한 장면지만, 이 장면이 끝난 직후 극이 종료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진다. 살인을 하는 오프닝 시퀀스와 다른 이 장면의 의미는 무엇이기에, 평온하면서 동시에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이 생기는 것일까. 


07. 관람자의 취사적인 감정 선택

    여기서 관람자가 보는 것과 감독이 보여주는 것에 이야기할 차례가 돌아왔다. 실제 관객은 바르가스가 목적을 이루는 것보다, 그를 보기 위해 영화를 봤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바르가스가 교도소에서 의자를 만드는 모습 봤고, 나무로 조각한 보관함 두 개를 가방에 넣어 출소했다는 것을 봤다. 그중 하나는 마리아의 집에 놓고 나오는 장면을 관객은 봤으며, 이로 인해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딸의 것일지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그렇기에 바르가스는 인형을 바라보면서 움직이는 나무 인형에 호기심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혹은 움직이는 원리를 파악해 손주들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선의를 가졌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관객은 인지한다. 그의 여정과 모습을 봤기 때문에, 죗값을 치루고 착한 사람이 된 것일까라는 막연한 기대가 마음 한편에 자리 잡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은 어린 아이들이 있는 천막에 갖고 들어가려다 선반에 놓은 장칼 또한 보았다. 여기에 ‘할아버지’라는 존재를 입증해줄 바르가스의 딸은 아직 보지 못했으며, 살인을 한 것으로 추측되는 바르가스가 인간과 비슷한 구체관절인형을 만진 후 칼을 움켜쥐며 (비록 그 후 선반위에 올려뒀지만) 아이들이 있는 천막으로 들어가는 것 또한 스크린을 통해 봤다. 이런 사실을 통해 위험과 공포라는 감정은 관람객에게 생긴다. 

    그러나 위에 언급된 감정들은 모두 관객 스스로 선택하여 쌓은 것이다. 실제 바르가스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다. 감독이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관객 스스로가 바르가스를 추측하며 판단했을 뿐이다. 

    감독이 엔딩장면에 장난감을 오랫동안 주시 한 채 끝낸 이유는 바르가스의 모습 혹은 결정을 보여주지 않음으로 인해 결과를 통해 영화와 관람객과의 거리를 두기 위함이다. 이 거리두기를 하는 동안 관객은 바르가스가 가진 마음이 선의 인지 혹은 악의인지 확신하지 못했기에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고, 자신이 본 것을 곱씹는 경험을 한다. 여기에 더해 장면이 유지되는 시간 동안 결정짓지 못하고 극이 종료되면서 추가적인 혼란을 겪는다. <자유>와 <죽은사람들>의 특이한 장면은 앞서 말한 두 편의 영화처럼 아름답지 못하고 좋은 감정을 남기지 못한다. 이 장면을 통해 느낌 감정은 영화 관람 종료 후 이 영화를 떠올리면 느껴지는 대표적인 감상이 된다. 


08. 교류와 이동이 가능한 세계의 주인공감독

    감독의 세계는 연결되어 있고, 영화마다 다른 경험을 경험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릭터들은 목적 달성에 실패한 것에는 변함없다. <자유>의 미사엘은 타인의 집에 찾아가지만 만나지 못했고, <죽은사람들>에서 아르젠티노는 딸을 만나지 못했다. <리버풀>에서 파렐은 딸과 어머니를 만났지만 다시 떠났다. <도원경>또한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다. 인물은 목적에 성공하지 못한 채 감독이 만든 세계에 머물러 있다. 유일하게 <판타스마>라는 공간에서 미사엘과 아르젠티노가 이동에 성공했으나, 이들 또한 극장을 나가지 못하니 갇혀있는 것은 변함없다.      결국 이 글의 초반에 언급했던 “무엇이 삶을 가동시키고 나아가게 할까?”라는 노파의 질문에 선뜻 답할 이가 없는 셈이다. 캐릭터들은 모두 살아 움직이며, 음식을 먹고, 성욕을 해결하고, 살육·살인을 하며 살아있음을 증명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갇혀있거나 혹은 사라진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감독의 세계는 앞서 말했듯 교류와 이동이 가능한 세계다. 캐릭터에게 활력을 불어넣었으나 동시에 실패를 만들고, 캐릭터에게 쉴 공간이자 떠날 수 없는 공간을 마련했다. 여기에 더해 소재는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 이는 하나의 유기적인 집합체다. 이 집합체를 한 명의 인물의 세계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감독인 리산드로 알론소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캐릭터들이 감독 자신인 것이며, 캐릭터들의 삶은 감독 자신의 단면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렇기에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는 <죽은사람들>과  떠났어도 관계를 그리워하는 <리버풀>, 포기하지 않고 나가는 <도원경>, 봐주는 관객이 없어도 극장을 떠나지 못하는 <판타스마> 등이 나타났다.

    영화 속에서 감독은 페르소나인 캐릭터의 해피엔딩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결과물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 감독이 철저하게 인물에게 관여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서론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관객과 서사·감정이 평행선을 이루고, 영화가 관객과 공명하는 것을 원치 않아 보였던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단면이기에 내면에서는 교류가 가능하지만, 진짜 타인과의 감정의 교류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감독은 스크린을 바라보는 관객이 ‘영화’를 통해 시·공간이 분리되면서 생기는 신비한 경험과 감정을 누릴 수 있게 하지만, 이것은 감독이 관객에게 원한 것은 아니다. 감독은 보여주기만을 하며 관객과 캐릭터의 몰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런 화면을 보며 취사(取捨)적으로 무엇을 볼지 선택하여 영화에 대해 판단하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은 관객이다. 감독과 관람객은 같은 것을 보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은 캐릭터와의 공명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대상으로 관객과 공명 관계를 형성했고, 이로 인해 감독의 텍스트는 오래도록 살아남는 생명력을 갖는다. 


09. 

    리산드로 알론소에게는 영화(작품)는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영화에 관객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을 감독은 원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관객에게 다양한 관람형태를 활용해 영화적인 체험을 제공한다. 다만 이 체험은 질서정연한 스토리의 나열을 통한 감정의 이입이 아닌, 그 외의 방식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이는 ‘영화를 보는 영화(<판타스마>)’, ’인물이 관객을 주시하는 영화(<죽은사람들>), ‘프레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관람객 사이에 거리감이 생긴 영화(<도원경>)등을 꼽을 수 있으며, 영화의 소재·인물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방식을 활용함으로서, 감독은 관객을 통해 자신이 만든 작품의 영원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관객에게 자신을 표현하되, 영화 속 상상을 자극할 수 있는, 리산드로 알론소 감독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과 솔직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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