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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Mar 04. 2022

영화 <더 랍스터> 감상평



영화 <더 랍스터>는 관객에게 ‘이질감’을 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데이비드(콜린파렐)가 했다는 대사를 상기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숨기는 것이 더 어렵다고 표현한다. 생성된 감정을 숨기는 것과 생성되지 않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데이비드는 이 대사를 통해서 자신의 현실과 호불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존재하는 데이비드는 흑백논리가 존재하는 사회와 어울리는 인물인가, 사회가 지향하는 지점과 맞는다면 어울리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부적응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렇다면 데이비드에게 사회는 과연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뻗어나갈 수 있다. 잠시 생각을 멈춰보자.

이 대사를 읽는 이는 이름도 없는 ‘근시여인(레이첼 와이즈)’이라 불리는 여자다. 데이비드가 들려준 이야기를 자신의 일기장에 적어 옮겨 놓은 것이다. 물론 그 일기장은 호텔 메이드(아리아 라베드)가 길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 외톨이 리더(레아 세아두)에게 읽어주는 것으로 추후에 밝혀진다.

주인공과 사건은 데이비드를 중심으로 벌어지는데 왜 타인의 시선과 목소리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화자는 누구인가. 이질감은 여기서 발생한다. 데이비드와 코피를 흘리는 여자, 절름발이 남자 등 모두 동일한 입장으로 느껴진다. 극을 관람한 필자는 마지막 한 시퀀스를 제외하고는 데이비드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없었다. 그는 그 누구보다 호불호 강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고, 이러한 데이비드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그것이 그를 응원하게 되는 결과 값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왜 그에게 몰입할 수 없을까 혹은 왜 인물에게 정서적 동기화가 될 수 없게 영화는 설정됐는가. 필자는 그것을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양성이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데이비드로 주인공이 선정되어 볼뿐이지, 다른 인물이 와도 별반 다를 것이 없을 정도로 획일화 되어 있는 세계를 데이비드는 여기저기 옮겨 다닐 뿐이다. <더 랍스터>에서는 사회적 규약이 각기 다른 두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호텔과 도시의 세계와 두 번째는 데이비드와 근시여인의 사랑이 존재하는 세계다. 호텔과 도시의 세계의 사회적 규약은 커플의 성사 여부다. ‘사랑’이라는 기준이 두 사람의 ‘마음’보다는 ‘공통점’으로 약속되어 커플의 성사여부가 결정되는 세상이다. 데이비드와 근시여인은 ‘마음’을 사랑으로 규정짓고, 둘만의 언어를 만든다. ‘마음’이 잘 통하는 것을 사랑으로 규정짓고, 세계 속의 작은 세계를 만든 데이비드와 근시여인의 삶이 올바른 방향이라면 눈을 도려내어 장님이 되는 것을 망설이고, 그런 그를 기다리는 여인의 모습으로 결말은 도달한 것은 어떤 의미란 말인가.

주인공 데이비드가 존재하는 두 가지의 세계를 경험했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감정, 그런 그에게 온전히 동기화 할 수 없는 감정이 양립하는 영화 <더 랍스터>는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사회’라는 질서를 이야기하고 싶었음을 알 수 있다. 모순과 괴이한 감정이 비단 사랑으로 해결되지 않고, 인물에 대한 애정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는 사회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 소재가 데이비드가 겪는 사회의 중심 가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어떤 이유로 극의 중심 가치가 됐고, 극의 모든 이들이 사랑에 대해 서 이야기하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것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치가 되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다. 다만 영화는 이 한가지의 가치에 대해서만 집중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한가지로만 규정된 사회 가치와 목표가 되는 지점이 설정이 됐음에도 내부를 구성하는 개인이 보이지 않는다. 이 규정은 개인과 약속된 것이 아니라, 사회가 그 스스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개인 자유의사가 없는 사회는 구성이 될 수 없고 세계는 성립될 수 없다. 영화 <더 랍스터>의 개인은 사회를 이루는 부품일 뿐이다.

도시(호텔)에서는 그 자신을 유지시키기 위해 개인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강요한다. 인물 개개인은 사랑이란 행위를 하는 방법으로 타인과 자신의 ‘공통점’을 찾는 것으로 해결한다. 숲속 외톨이 존재들은 자유의사를 주지만 사랑이란 행위를 절대 해서는 안 된다. 외톨이들의 세계에서도 그 자신을 유지시키기 위해 개인에게 사랑을 추구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개인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는 어느새 주객이 전도된 것을 <더 랍스터>는 보여준다. 근시여인이 장님이 된 이후 외톨이 무리와 또 다른 무리를 이룬 커플은 도시로 돌아가지 못한다. ‘공통점’이 있어야하지만 데이비드와 근시여인의 공통점은 이제 없다. 그들이 가진 공통점 그들만의 암호(언어)라는 규칙뿐인데, 이것은 도시의 규칙과 다르기에 획일화된 사회에서 이들을 받아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장님이 되기 위해 화장실로 간 데이비드는 장님이 됐는지 되지못했는지 여부는 나오지 않는다. 그가 머뭇거리는 모습만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는 처음으로 데이비드의 행동에 공감이 갔다. 자신의 신체를 훼손하는 것뿐만 아니라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러 사회를 거치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던 데이비드의 행동이 마지막에 공감가는 이유는 데이비드가 평생을 살아온 도시에서 부터 교육된 사회적 가치인, ‘공통점’을 찾아 사랑을 한다는 규칙을 벗어나 마침내 개인을 위한 고민을 하는 첫 장면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찾는 실마리로 ‘공통점’을 설정한 이유는 개인이 갖는 ‘불안’과 ‘공허함’때문이다. 도시로 대변되는 사회는 이것을 알았기에 개인이 찾는 사랑을 ‘동일한 그 무엇’으로 설정했다. 현실의 대중들에게도 사랑을 구성하는 의미 중엔 불안, 공허함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고자 하는 말은 감독은 이 지점을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누구나 불안과 공허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결코 타인 혹은 사회로부터 채울 수 없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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