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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an 19. 2022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감상평

01.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봤다. 관람하는 내내 제목이 마음에 걸렸다. ‘너는 여기에 없었다’라는 제목이 말이다. 당신이 이곳에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당신’을 지켜본 타자인 사람이 그 곳에 있어야하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내내 조(호아킨피닉스)는 대부분 혼자 화면에 등장한다. 그렇다면 조가 서술을 하는 ‘당신’은 누구인 것일까? 혹은 이 극은 조를 바라보는 인물이 풀어내는 이야기인 것일까?

    조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인물은 일을 소개해주는 엔젤, 존 그리고 조의 어머니, 니나뿐이다. 그리고 이들 중 엔젤, 존, 어머니는 죽음을 맞이한다. 와중에 살아남은 인물은 니나 뿐이다. 하지만, 니나는 정말 살아있는 것일까? 영화 구조상 니나는 주인공인 조를 물리적인 이동을 시키는 유일한 목적이 되는 인물이다. 이것 외에 그녀가 살아남은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지점은 그녀가 등장할 때를 상기시켜야한다.


02.

    영화<너는 여기에 없었다>를 볼 때 특이한 지점이 발생한다. 극 초반 엔젤을 만나러 조가 전철을 기다리는 중, 조는 길의 바닥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때 조의 옆에는 그를 향해 몸을 틀어 정면으로 응시하는 이상한 여자가 있고, 그 옆으로 전철이 들어온다. 관객이 바라보는 앞으로 전철이 지나가고, 조는 그 여자 방향을 향해 응시한다. 그리고 전철이 사라지고 난후, 카메라는 조의 빈자리를 전철이 프레임에 들어오기 전과 같은 위치에서 잡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카메라의 시선이 향하게 잡는다. 그 후 엔젤의 사무실에 조가 등장한다. 전철을 타는 행위, 그 여자와의 관계(시선) 등이 맥락상 끊긴 것이다. 그리고 조와 엔젤의 서로 섞이지 않는 대화 시퀀스 직후에 바로 전철이 들어오는 장면이 반복된다. 조가 볼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라면 열차의 방향은 반대가 되어야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전철은 같은 방향으로 들어온다. 화면이 다시금 연결되는 것이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조를 응시하는 여자와 조는 서로를 마주보는 것으로 그려진다. 조는 정말 보트 의원에게서 일을 받아온 것일까? 이 시퀀스가 의미하는 서사성을 갖은 채, 무의미하게 표현된 ‘단절’(영상)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좀 더 앞서 말한 작위적으로 해석하여 말하자면, 그곳에 있었던 ‘너’와 그것을 바라보는 ‘타인’의 관계 정립은 이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으로 풀이될 수 있을까?


03.

    이러한 ‘단절’은 영화 속에서 한 번 더 일어난다. 소녀의 아버지를 만나고 나서, 장비를 사서 나오는 조에게 관광을 온 동양인 소녀 무리가 그에게 사진을 찍어주길 요청한다. 사진을 찍으려는 조에게 동양 소녀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 채 관객에게 보인다. 아마도 소녀를 보는 대상은 조(호아킨 피닉스)라고 추측된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호아킨 피닉스)일까? 그 장면은 누구를 위해 계산된 화면인가? 영화 속 눈물이 고인 소녀가 비치는 장면과 겹치는 소리는 그와 그녀의 소리가 아니다. 그 소리는 이미 조가 장비를 구매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리의 시작점과 소리로 인한 감정의 주인이 눈물이 고인 소녀라고 생각한다. 서사성을 갖지만, 알 수 없게 표현된 ‘단절’(소리)이 다시금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작위적으로 해석하자면, 그곳의 동양 소녀와 그녀를 카메라를 통해 바라보던 조의 상관관계는 성립이 되는 것일까? 조는 관객으로 대체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답변은 되지만, ‘왜’라는 답변에서는 좀 더 멀어지게 된다.


    동양인 소녀와의 조우 이후, 조는 근처에 주저앉고 만다. 그 후 다시금 장비를 구매하러 간다. 20분이나 판매상을 기다렸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판매상을 때리기 까지 한다. 영화 속에서 그가 20분 동안 판매상을 기다리는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본 것은 그가 물건을 사러 나온 후, 동양인 소녀를 만나 과거 시절의 일로 인해 괴로워했다는 것과 매장에서 집은 테이프를 자동차 안에서 뜯어서 보관을 했다는 것과 판매상에서 무엇을 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조는 과연 눈물 고인 그녀를 본 것일까? 판매상을 기다리는 20여분 동안 사진을 찍어준 동양 여성인들 을 주인공으로 한 환각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동양의 소녀를 만나 것과 판매상을 만난 것이 별개의 일정이었다면, 두개의 만남을 무엇을 의미하며 그 사이의 시간간극은 단순 스토리의 부재인 것일까?


04.

   이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도 연결된다. 니나가 조를 떠나갔다고 여겨지는 순간, 조는 자신의 목에 총을 겨눠 자살을 한다. 영화초반에 그는 입에 칼을 넣거나, 칼을 발에 떨어뜨리는 등의 자해시도를 여러 번 했으나 실패했다. 그런 그이기에 관객은 그가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곧바로 등장한 점원이 테이블에 두고 간 빌지를 보며 서사적인 ‘단절’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 언급한 ‘단절’의 공통점은 조의 상상이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상상을 깨는 유일한 영화 속 인물은 니나 뿐이다. 실제 지하철 장면과 동양인 소녀와의 만남은 단절로써 끝이 났으나 그의 자살을 상상하는 장면에서는 니나가 개입하며 유일하게 그 상상을 허상으로 만든다. 조의 자살 후, 니나가 돌아와 “나가요. 날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순간, 죽음에서 되살아 온 조는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하지 못하고 쉐이크만을 마신다. 그들 곁에는 이미 몇 잔의 쉐이크가 있는 것으로 봐서 꽤 오랜 시간 상주 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영화 속에서 (호텔의 카운터를 지키는 이를 제외한) 인물들중 니나와 조, 단 두 사람만이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음식을 먹었음을 알 수 있다.


05.

   다시금 첫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니나는 정말 살아있는 인물일까?’라는 질문은 방향이 잘못됐다. 니나의 실존여부와는 다르게 그녀의 존재이유가 조의 실존의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니나를 만나기 전 조는 죽음과 슬픔을 상상 하며 자신의 삶을 단절시키며 그러한 삶을 반복하며 살았을 것이다. 니나를 만나기까지 말이다. 조에게 니나라는 존재는 자신이 갖고 있던 트라우마를 물리친 영웅과도 같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을 구하지는 못했어도 자신과 함께 살아남았던 어머니를 대신할 존재로써 말이다. 또한, 조는 니나를 보호하는 것에서 벗어나 동일시 화하는 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조의 최종 바램은 조가 니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너는 여기에 없었다’는 문장의 주체는 조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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