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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피셜 지오그래픽 Sep 22. 2021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짐바브웨 마토보 언덕을 거닐다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한 대학생 지리학도가 10개 나라를 ‘탐험’한 기록이다. 이런 류의 기록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배낭여행’이라는 단어 대신 탐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찾아간 곳들의 지구생태적 가치가 우선은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구의 살갗 아래까지 날 것 그대로 바라 본 시선이 단순한 여행의 차원을 넘은 까닭이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야 비로소 그전까지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한다(김영민, 공부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 연재물이 가치를 갖는 것은, 젊은 지리학도가 170일간의 탐방을 통해 새로운 것들, 현상들, 문제들을 발견했다는데 있다. 이런 연유로, 연재물의 타이틀 [내’피셜 지오그래픽]은 ‘내가 쓴 특별한(스페셜)’, ‘내가 생각을 교정하여 정의한(나의 뇌피셜)’ 등의 중첩된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연재물은 모두 10회에 걸쳐 독자들과 만난다. [편집자]


내가 짐바브웨의 마토보 언덕(Matobo Hills)에 간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특이하게 생긴 돌'을 보기 위해서였다. 어째 내 눈에는 이런 것들만 보일까도 싶지만, 좋아한다는데 굳이 이유가 있어야만 할까! 그냥 좋다.


세계 3대 폭포이자 액티비티의 천국으로 불리는 빅토리아 폭포, 그곳에서 햇빛을 너무 쬈는지 조금은 아픈 머리를 가누고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덜컹이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여행의 낭만을 더했다. 생각보다 남아프리카의 겨울은 추워서, 침낭에 몸을 부볐다.


하룻밤을 꼬박 달려, 수도 하라레(Harare)에 이어 짐바브웨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불라와요(Bulawayo)에 도착했다. 영국 식민시절의 영향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듯, 곳곳에 유럽풍 석조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선선한 날씨와 적당한 고도감이 더해져 이국적인 냄새를 물씬 풍겼다. 도시락을 넣은 가방을 메고 마토보 언덕으로 떠났다.



짐바브웨의 최고권 지폐에는 다름 아닌 '돌'이 그려져있을 정도로, 짐바브웨에는 돌이 많고, 그만큼 돌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 돌의 종류는 '화강암(granite)'이다.


마토보의 수많은 언덕 중에서도 가장 높은 언덕에 올라섰다. '세계의 눈(World's view)'이라고 불리는 곳. 집채만 한 돌덩이들이 구를 듯 말 듯 어설프게 놓여있는 형상이 과연 영화 <파워 오브 원>에서 보던 것이 분명했다. 이 돌덩이들의 정식명칭은 '토르(Tor)'. 우리말로는 '핵석(core stone)'이라고 한다. 북한산이나 설악산과 같은 돌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들바위가 바로 토르인 것. 동글동글하게 생겼다고 해서 모두 자갈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자갈은 물에서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토르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우리는 당연히 산이 솟아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의 생각을 지배하는 이 고정관념을 잠시 내려놓아 보았다. 사실, 산을 덮고 있던 두꺼운 지표면이 긴 세월에 걸쳐 비바람에 씻겨 내려가고, 단단한 부분만 남게 된 것이 현재 보이는 산의 모양이다.


그러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깊은 지하에 묻혀있던 암반이 높은 압력으로부터 해방되면서 쩍쩍 금이 가지 않을까? 그 갈라진 틈을 '절리(joint)'라고 한다. 왜, 우리 몸의 뼈와 뼈 사이의 관절도 영어로 joint라고 하지 않는가. 이 절리와 절리 사이로 빗물이 침투하면 화강암의 '풍화(weathering)'가 진행된다. 풍화란 쉽게 말해, 돌이 썩는 과정이다. 돌이 썩으면? 그렇다. 흙이 된다.


교차하는 절리면을 따라 풍화가 진행되면 가운데의 신선한 부분만 남아 둥근 모양의 화강암괴가 남게 되고, 주변의 썩은 풍화물들은 빗물에 씻겨 내려간다. 이렇게 토르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화강암은 어떻게 이토록 한 줌의 흙도 없는 민둥산을 만들 수 있는 것일까?


화강암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광물 가운데 하나가 '석영(quartz)'이라는 광물이다. 이 석영은 쉽게 말해 모래알이다. 풍화된 화강암은 잘게 부서지는데, 이때 떨어져 나오는 모래알은 빗물에 쉽게 씻겨 내려가기 때문이다.



이 신비롭고 처연한 장소가 풍기는 정서는 예전부터 많은 이들의 눈독을 샀나 보다. 남아프리카의 식민지 정치가 세실 로즈(Cecil John Rhodes, 1853~1902)는 이곳에 안장되기를 원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걸 보니, 한때 대륙을 주름잡던 제국주의자라고 죽음을 피할 순 없었나 보다. 짐바브웨의 옛 이름 로디지아(Rhodesia)는 로즈의 성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로부터 백 년의 세월이 지나 잡초만 무성한 마토보 언덕에는 쓸쓸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로즈의 무덤 옆에는 샹가니 기념비(Shangani Memorial)가 웅장하게 서 있다. 그런데 그것은 짐바브웨를 침략하다가 전사한 영국군을 기리는 것이다! 짐바브웨의 입장에서는 오욕의 산물이거늘, 지금까지 그대로 두고 관광객을 반기는 이유를 물었다. "It's a history(역사일 뿐)" 라는 가이드의 짧은 대답을 듣자, 예상치 못한 전개에 순간 '벙찌고' 말았다. 우리나라였으면 진작에 때려부수었을 것이라고 말하자, 이번엔 "I can't judge that(내가 판단할 일이 아냐)"라는 시니컬한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로즈의 무덤 옆에 앉아 끝없이 펼쳐진 화강암 바다를 바라보았다. 영화 <파워 오브 원>이 눈앞의 풍경과 오버랩됐다. 특히, 남아프리카에서 성장기를 겪는 영국인 소년 P.K에게 인생의 멘토 할아버지가 가르침을 주는 대목이... "학교에선 자료를 머릿속에 담고, 자연에선 네가 본 것과 느낀 것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우거라. 네가 품게 될 모든 질문의 답은 자연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자연은, 그대로 있다. 우리 인간이 아무리 정복자인 양 행세한다 해도, 인간의 유한성은 자연의 무한성에 털끝조차 닿지 못한다. 제국의 정복자 로즈가 마토보 언덕 위에 누워있으나 언덕 아래에 누워 있는 수많은 죽은 이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는게 그 증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토보는 그대로 있다.


인간은 결국 자연에서 ‘풍화’되는 종(種)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기에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지 않을까.


마토보 언덕 위에서,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것들 곧 사라지고 없을 것들을 잠깐이나마 떠올렸다. 이것이 호모 사피엔스의 출발지, 아프리카로 여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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