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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옵니언 Nov 28. 2023

그 여름에는 볼 수 없던 것들

크리스티안 페촐트, 〈어파이어〉 리뷰

    〈어파이어〉는 독일 감독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작품이다. 관람한 그의 전작이 〈피닉스〉밖에 없었지만 보기 전부터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피닉스〉에서 보여주었던 섬세한 연출과 치밀한 각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첫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얼굴을 다친 주인공을 비추는 게 아니라 주인공을 바라보는 인물의 표정 변화를 보여준다거나 마지막 시퀀스에서 주인공이 나간 자리의 카메라 포커싱이 변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실제로 〈피닉스〉는 감독에게 현재의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평단과 관객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았다. 〈어파이어〉는 감독이 앞서 제작한 역사 3부작(에 이어 원소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으로 메인으로 다루고 있는 원소는 불이다. 73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감독의 작품 세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이나 사회적인 문제를 독일 사회를 통해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피닉스〉가 아우슈비츠 사건을 다루고 있는 부분도 그렇다. 이번 작품인 〈어파이어〉는 표면적으로 휴가 영화 혹은 청춘 로맨스물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코로나 시기에 감독은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며 독일 여름에 어울리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작품을 기획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감독의 기존 작품들에 비해 소재적, 주제적인 측면에서 가볍게 느껴진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페촐트는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으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좋은 영화를 보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무엇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지 망설여지는 경우가 있다. 〈어파이어〉가 나에게는 그런 영화다. 작품에는 네 인물의 한여름을 다룬 해프닝과 같이 보이기도 하고, 예술가에 대한 풍자 같기도 하며, 한 사회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며, 나아가 모든 인간의 한 시절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어파이어〉가 좋다고 생각한 건 Wallners의 〈In My Mind〉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면서 부터다. Wallners의 음악은 영화가 상영되고 30초쯤 등장하니 어쩌면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객관적인 판단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관람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소설가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과 사진작가를 희망하는 펠릭스(랭스턴 위벨)가 소설 집필과 예술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포트폴리오 준비를 위해 발트해의 한 별장으로 휴가를 오면서부터 시작한다. 휴가를 오는 길에 차는 도로 한가운데에서 고장 나고 주변은 산불이 타오르고 있다. 어렵사리 도착한 별장에는 나디야(폴라 비어)가 머무르고 있었고 밤이 되면 데비트(엔노 트렙스)와 관계를 맺는 소리에 불편함을 느낀다. 레온은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는 니다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레온과 다르게 펠릭스는 포트폴리오 만드는 일은 잊은 듯 나디야와 데비트와 어울리며 시간을 보낸다. 펠릭스는 글이 안 써진다는 이유로 여전히 예민하지만 나디야를 향한 호감을 유지하고 있고 다른 친구들에게 소외당하는 것에도 적극적으로 자기감정을 드러낸다. 그럴 때마다 나디야는 사람 좋은 얼굴로 레온을 중재하고 충고를 건넨다. 그 사이 펠릭스와 데비트는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레온은 사람들을 깔보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디야가 해변에서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이유로 청소 도우미와 비교하거나 펠릭스의 자기소개를 인정해 주지 않거나, 데비트를 안전 구조원이라며 동독 출신으로 비유하며 무시하기도 한다. 

    영화는 레온의 소설을 보기 위한 편집자 헬무트(매티아스 브랜트)가 등장하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사실 레온은 헬무트에게 원고를 보여주기 전에 나디야에게 먼저 원고를 보여주지만, 쓰레기라는 혹평을 받은 상태였다. 헬무트는 별장에 도착해 레온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새로운 작품을 쓸 것을 권유한다. 헬무트는 오히려 펠릭스의 포트폴리오와 나디야에게 관심을 보인다. 헬무트와의 식사에서 나디야는 문학 박사학위 준비 중인 학생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레온은 배신감을 느끼며 나디야를 몰아세우기도 한다. 식사를 마치고 레온과 데비트는 휴가 오는 날 두고 왔던 차를 가지러 떠난다. 그 사이 산불은 더욱 심해져 마치 별장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듯 재가 휘날리고 있다. 날리는 재 뒤로 헬무트가 갑자기 쓰러지고 머뭇거리는 레온을 뒤로하고 나디야의 운전으로 병원으로 향한다. 레온을 걸어서 병원을 뒤따르고 가는 길에 산불에 죽은 동물들의 사체를 본다. 헬무트의 병원에서 나온 후, 레온은 헬무트와 나디아가 자신을 무시한다며 짜증을 낸다. 레온에 말에 나디야는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병원에서 헬무트가 있던 병실은 암 병동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돌아온 집에서는 경찰관이 있고, 그들에게 차를 가지러 간 펠릭스와 데비트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산불에 휩쓸려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펠릭스와 데비트의 시체를 보고 슬퍼하는 나디아와는 달리 레온은 둘이 껴안고 죽은 모습에 폼페이의 연인을 떠올린다. 나디야는 그런 레온을 보고 뛰쳐나간다. 레온은 뒤늦게 나디야를 따라가 보지만 그녀는 이미 짐을 모두 챙긴 채 별장을 빠져나간 뒤였다. 레온은 이때의 추억으로 소설을 집필하여 헬무트를 찾아간다. 헬무트와 소설의 출간을 마무리 짓고 나오는 길에 레온은 나디야를 만나고 영화가 마무리된다. 


    영화를 보다 보면 레온은 정말 끔찍한 인물이다.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이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레온과 펠릭스가 별장으로 향하는 차에서 시작한다. 운전하는 펠릭스 옆에서 레온은 계속해서 잠을 청하고 있다. 차가 이상하다는 펠릭스 말에 일어나지만, 자신은 차의 고장과는 별개라는 듯 다른 생각에 잠겨있다. 첫 시퀀스를 통해 관람자는 레온이 어떤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측은 정확하게 적중한다. 레온은 계속해서 자신의 세상에 갇혀서 외부로 시선을 돌릴 줄 모른다. 별장 천장의 보수 공사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장면이나 질투와 꿈에 눈이 멀어 병원에서 헬무트의 병동조차 인지하지 못하며, 친구의 죽음에 동조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본다면 처절하게 결핍된 공감 능력에 화가 나기까지 한다.

    마침내 레온은 스스로 목적을 잃게 되기도 한다. 나디야를 좋아하지만 나디야의 호감 표시는 알아채지 못한다. 산불에 점점 번져 별장을 향해오고 있지만 그런 사실을 대면하지 못한다. 결국 산불에 자신의 일상이, 아끼던 친구가 삼켜질 것이라는 건 상상도 못 한 채 자신에게 갇혀있다.

    또 레온은 오만하고 선민의식에 가득 찬 사람으로도 보인다. 자신이 하는 글쓰기를 ‘일’이라고 칭하지만 다른 행위(차를 가지러 가는 일이나 설거지)를 일이라고 하는 것에 굉장한 불만을 품고 있다. 이런 생각은 타인을 대할 때도 드러난다. 예술 전공생이 되지 못한 펠릭스의 작업물을 무시하거나, 문학 전공자인 걸 모르는 상태의 나디야에게 이해하지 못할 거라며 글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모습들도 그렇다. 줄거리에 서술된 것처럼 그의 이러한 사고는 헬무트가 등장하며 역전된다. 자신이 하는 일이 대단하고 생각하는 알량한 예술가의 편견이 부서지는 순간이다. 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레온의 성격은 과거 지적 허영심에 가득 차 영화를 만들던 시절 자기 모습이 투영된 것 같다는 말이 인상 깊다.

     하지만 우리가 레온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답답해하지만, 선뜻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레온에게 극단적인 설정이 응집되어 있을 뿐 레온의 행동 중 한 장면에서는 자기 모습을 비춰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에서는 산불은 아무 의미 없는 산불에 불과하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를 관람하고 나면 레온은 불의 형상이 되려는 자처럼 보인다. 초반의 산불이 마치 레온처럼 인물들이 머무르는 공간과 동떨어져 존재한다는 점도 그렇고, 산불에 잠식당해 죽임을 당한 친구들의 모습도 레온의 선민의식에 잠식된 사회적 시선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펠릭스와 데비트는 레온과 반대로 물의 형상처럼 보인다. 먼저 펠릭스의 포트폴리오 작업물을 보면 알 수 있다. 펠릭스는 바다에서 휴가를 보내는 사람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나란히 배치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또  데비트는 바다에서 일하는 구조사이다. 그들은 언제나 자유롭게 수영하지만 레온은 영화 내내 한 번도 수영하지 않는다. 나디야는 그 두 존재를 이어주는 존재처럼 보인다. 레온이 처음 나디야를 보게 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레온은 나디야를 창문을 통해 보게 된다. 그때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붉은색으로 불의 이미지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물의 속성에 가까운 인물처럼 변한다. 나디야는 영화 속 두 속성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거시적 차원으로 확대 해석 해 볼 수 있다. 불의 이미지는 관조적이고 위선적이지만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며 정상적이라고 칭해지는 사회를 형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물의 이미지는 불의 세계에서 배제되고 혐오 받는 사회 집단을 형상화한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레온이 데비트에게 동독 출신이냐고 되묻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그 질문에는 동독 주민이 소득 수준이 낮고 실업률이 높다는 것을 바탕으로 지역감정이 내포된 질문이다. 이 질문 하나에는 소득 수준이 높은 서독을 주류사회로, 반대인 동독은 비주류 사회로 구분 지어진다. 산불의 피해자가 펠릭스와 데비트라는 것도 이런 부분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사회적인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기 쉽다. 다시 영화적으로 해석해 보면 펠릭스와 데비트의 연인관계는 정상성이라고 칭해지는 범주 바깥의 존재하는 물의 관계이며, 결국 불이라는 정상성의 상징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독일 사회에서 관조적이고 위선적인 인물들에 의해 만들어진 주류사회에 의해 혐오와 차별이 당연시되고 있다는 것으로, 산불에 휩싸여 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식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영화 속 레온의 행동들은 펠릭스나 데비트 같이 사회의 밖에서 내부로 편입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성애를 하고, 그들과 다른 품위 있는 글쓰기를 통해서 말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영화는 일인칭에서 삼인칭으로 전환되며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레온은 책을 출간이 결정되는 장면에서 영화 자체가 레온의 소설로 만들어진 거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레온의 소설도 데비트와 펠릭스의 이야기를 통해 이루어 낸 것으로 본래 레온이 바랐던 글쓰기를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또한 나디야와의 사랑도 실패했다. 그런데도 레온이 펠릭스와 데비트의 관한 소설을 마무리 짓고 나디야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위치에서 차별받고 혐오 받는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레온이 자신의 지난 행동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얻었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레온이 바라보는 공간에 실제로 나디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장면은 마치 레온의 치기 어린 한 시절에 건네는 작별 인사 같은 장면이다. 레온이 나디야를 보고 웃을 수 있는 용기는 지난여름 혹은 지난 세월 동안 한 개인이, 한 사회가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by 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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