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규칙은 영화관의 규칙과 다르다.
얼마 전, <오키쿠와 세계>를 보면서, 영화를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궁금증을 품게 한 독특한 경험은 영화의 내용보다도 내용의 바깥, 즉 관객의 자리에서부터 비롯했습니다. 간략하게 그 경험에 대해 설명하자면,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관객들은 두 번 정도 끔찍한(?) 봉변을 당하게 됩니다. 한 번은 무사의 변소를 청소하고 나오던 과정에서 무사 한 명이 '야스케'를 무례하게 밀치는 바람에 그의 몸이 온통 오물로 뒤덮이게 된 장면과 '야스케'와 '츄지'의 작업을 못마땅하게 여긴 의뢰자가 오물통을 들어 그들 몸 위로 부어버린 장면이 그 예입니다. 영화의 대부분은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관객들은 몸 위로 쏟아지는 오물 장면에 대해 그나마 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오물이 몸에 쏟아지는 장면마다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야스케' 나 '츄지'라도 된 듯 놀라는 관객 한 분이 있었습니다. 분명, 영화 속 인물과는 연관되지 않을, 바깥의 감상자에 불과할 그 관객은 왜 그렇게 놀랐던 걸까요. 아니,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관객이 영화관을 찾는 이유는 다소간 명확하다고 여겨집니다. 영화에 밀도 높게 몰입하기 위해 영화관이라는 최적의 장소를 찾는 것이죠. 영화관은 이러한 몰입감을 최대로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칙들을 정해둡니다. 앞 좌석을 발로 차지 말 것, 휴대폰은 잠시 꺼둘 것, 상영 도중에 큰 소리로 얘기하지 말 것 등등. 대개 어느 영화관을 가게 되더라도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규칙이자 영화관 내부의 몰입감을 흐트리지 않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관객이 영화관을 찾는 이유가 영화에 대한 몰입감을 지키기 위함이라면 앞선 행동은 영화관의 규칙을 헤치면서 영화에 대한 몰입감을 깨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종종 그 몰입의 경계를 스스로 헤치는 듯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코미디 영화이거나 공포 영화를 볼 때면 심심찮게 영화관 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 소리나 비명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죠. 그때의 무너진 영화관의 규칙은 영화에 대한 몰입감도 함께 흐트러트린 걸까요? 그렇다면 관객들은 일부로 영화관의 규칙을 어기면서 영화의 목적, 즉 몰입감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걸까요? 영화에 대한 몰입감의 기준은 누가 정해준 걸까요? 몰입하면서 시끄러워지는 영화와 몰입감을 위해 조용해져야 하는 영화관이 서로 충돌하는 순간입니다. 그때 관객은 어디에 초점을 두고 이 현상을 해석해야 할까요.
제프리 잭스는 객석에서 누구나 불현듯 몸을 움직이거나 꿈틀대는 무의식적인 반응을 다분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뇌가 영화감상용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지만, 영화는 이런 뇌의 작용을 교묘하게 이용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는 게 그의 입장이죠. 윌리엄 제임스를 경유해 우리가 뭔가를 보자마자 자동적으로 적절한 반사행동이 튀어나오는 것은 흔한 행동방식 중 하나이며, 일체의 가식이 배제된 과정이라고 합니다. 예컨대, 공포 영화에서 놀라게 하는 장면이 등장할 때, 그런 감정이 자체가 등장하지 않다고 여기는 일이 가식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스탠리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내추럴]의 예시로 들며 관객의 몰입도와 영화 속 인물의 행동이 서로 동조화되는 순간을 짚어냅니다. 이를 '거울법칙'을 통해,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되고 있다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러한 거울법칙을 따르는 이유에 그는 사회진화론적으로 풀이하며 인간은 매우 사회적인 종이기에, 생존을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의존할 필요가 있고 이 거울법칙은 단순히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운동표상을 매개로 더 '영리한 행동'을 유도한다고 합니다. 어떤 장면을 보면 그 이후의 과정을 한 발 앞서서 연상하는 것이 우리의 뇌입니다. 여기서, 한 편의 영화(혹은 영상물)가 떠오르곤 합니다. 바로,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입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이 최초의 영화인지 기록된 영상물이기에 영화로 보기 어려운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기차가 관객에게 도착하는 과정에서 몸을 움찔거리게 만들었다는 신화는 최초의 영화란 몰입감을 상당 부분 기저에 둔 채 탄생했다는 점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예컨대, 영화는 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 관객의 경험에 충돌을 자아내며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들 기존의 인식론적 한계를 넘어서 더 거대한 것이 다가온다는 숭고미를 창출(씨네샹떼. p. 46~47)하는 한편, 이전의 체험해보지 못한 즉각적인 감각에 그들 스스로를 떠맡기고 있는 셈이죠. 영화는 관객을 스크린 안쪽 가장된 세계 속으로 그들을 대입시키곤 그 자체가 마치 현실이 된 듯한 허구감을 통해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미 영화 속 세계에 몰입된 관객들은 모방된 감각으로 인해 현재의 몸(반응)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게 되지만, 영화관은 그런 반응을 일체 억제시키고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영화의 규칙은 필연적으로 영화관의 규칙과 어긋날 수 밖에 없어집니다. 영화는 과한 몰입감을 이용해 발전했지만, 영화관은 그와 정반대로 발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관의 규칙에서 벗어난 영화의 규칙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요. 사실 모든 영화에는 어디 한 구석쯤 몰입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지만, 구태여 <오키쿠와 세계>를 그 예시로 가져온 건, 오로지 특수적인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지점은 <오키쿠와 세계>는 그런 영화의 몰입감을 조정하는 유별난 장치가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오키쿠와 세계>는 부제와 함께 짤막한 단막극이 몇 편 이어져 있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한 번 언급한 것처럼 영화는 대개 흑백으로 이루어져 있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관객들은 흑백으로 된 스크린 속 세계를 몰입하게 됩니다. 그런데, 각 장이 끝나는 마지막 쇼트에서 시종일관 흑백이었던 장면이 생생한 색감을 통해 표현됩니다. 여기서 관객들은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생생한 색감이 담긴 쇼트야말로 그간 우리가 인식해오고 있던 진짜 현실이나 다름없는데, 갑작스럽게 등장한 탓에 오히려 현실감이 한순간 무너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몰입감은 그것이 실제와 얼마나 닮아있는지, 그리고 그 실제를 얼마나 잘 구현했는지와 관련이 없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앞에 펼쳐져 있는 스크린 속 세계를 어떻게 잘 설득시키고 있는지에 대한 관건입니다.
<오키쿠와 세계>에서 갑작스런 생생한 이미지의 등장은 앞선 흑백으로 점철된 세계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됩니다. 애시당초,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은 이상, 우리는 영화가 얼마나 재현해내고 있는가를 따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얼마나 생소한 것까지 재현해낼 수 있는가를 따져물을 수도 있을 겁니다. 분명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을 지라도 영화를 통해서라면 미지의 것들도 어디까지나 구현이 가능해집니다. <오키쿠와 세계>에서 투사되고 있는 흑백의 색감은 서서히 관객의 눈을 몰입시키고 그 세계를 함께 안착시킵니다. 그리고 찰나의 생생한 이미지가 등장함에 따라 마치 카메라 플래시를 마주한 것처럼 순간적인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에 깊게 몰입하고 있던 관객들은 그 반응을 통해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 이질감이 크면 클수록 영화에 얼마나 몰입하고 있었는지 반증이 됩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오물이 몸 위로 떨어지는 장면을 통해 자신의 몸이 오염되는 듯 반응한 관객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객의 몸 위로 떨어지는 오물은 진짜일 리 없으며, 영화관 내에 위치하지도 위치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영화 속 세계에 깊게 몰입한 관객은 정면을 향하는 스크린이 곧 현실과 다름없다고 받아들이곤 영화 속 '야스케'와 자신을 거울법칙 삼아 이해하게 됩니다. 이때의 관객은 영화 속 '야스케'나 다름없게 됩니다. '야스케'가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관객은 그를 둘러싼 불합리한 세계를 함께 파악하게 되고 그가 세상을 향해 자조 섞인 농담을 던질 때, 농담조의 의미와 맥락이 단순 텍스트에 그쳐 읽히지 않을 것입니다. 그에게 오물을 뒤덮었던 무사에게 반대로 오물을 던지는 행위에서는 짜릿한 쾌감까지 느끼기 마련입니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보자면 '오키쿠와 세계'에서 시작한 제목이 '오키쿠의 세계'로 끝나는 것 역시 심상치 않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관객과 영화는 각각 독립된 주체들로 '와'라는 접속 조사를 통해 개별 되지만, 영화를 보는 과정에서 관객은 영화를 체험하게 되고 이를 토대로 "오키쿠와 세계"를 "오키쿠(에 대입된 관객)의 세계(영화)"로 이해하게 됩니다. 결국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와 관객을 일치시키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여전히 영화를 볼 때면, 영화관보다도 집에서 편안히 보는 걸 가장 추구합니다. 가끔 보기가 버거울 때면 잠시 쉬었다가 보기도 하고, 몇 날 며칠에 걸려 한 편을 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오히려 그런 방식이 영화의 몰입을 헤치는 거라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꼭 영화를 한 자리에 앉아 진득이 보는 방식이 영화에 대한 몰입을 유지시키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구태여, 인터미션이 존재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일테지요. 가끔은 정말 좋을 영화를 볼 때, 감상을 온몸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영화가 그렇게 몰입하라고 만들었으니 나름대로 영화의 의도에 가장 충실해질 따름입니다. 영화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건, 현실을 잠시 잊고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세계의 발견입니다. 그 발견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충분히 표출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영화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영화가 그렇게 몰입하라고 시키니까. 영화의 규칙은 영화관의 규칙과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by. filmstone
<참고 서적>
[영화는 우리를 어떻게 속이나]. 제프리 잭스. 양병찬 옮김. 생각의 힘.
[씨네 샹떼]. 강신주. 이상용.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