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밤바다, 소녀가 던진 질문에 대하여
인간은 누구나 시간을 산다. 하지만 그 시간이 누구에게나 같은 의미는 아닐 것이다. 행복으로 충만한 하루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향한 기대로 부풀어 오르고, 견디기 힘든 고통의 하루는 다가올 내일마저 두려움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는 매일의 시간 속에서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아니면 정해진 끝을 향해 소멸하며 ‘죽어가는’ 것인가.
과거는 때때로 파도처럼 밀려와 현재의 나를 속절없이 뒤흔든다. 서늘한 모래의 감촉, 짠 내 섞인 밤공기가 생생한 제주도의 밤바다가 떠오른다. 곁에 앉아 있던 한 소녀의 모습, 세상을 감싸던 규칙적인 파도 소리와 그 정적을 깨뜨리며 밤하늘을 수놓던 불규칙한 폭죽 소리. 그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던 순간, 소녀는 나지막이 물었다.
“인생이란 뭘까요? 오늘처럼 행복한 순간은 저를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되니 살아있는 것만 같아요. 하지만 불행이 찾아올 땐 과거의 기억들이 저를 집어삼켜서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워요. 인생은 살아가는 건가요, 아니면 죽어가는 건가요?”
그 질문에 나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단단한 알에 금이 가듯, 당연하게 여겼던 내 생각의 세계에 신선한 충격이 가해졌다. 행복한 오늘은 미래로, 불행한 오늘은 과거로 우리를 이끄는 걸까. 그렇다면 오늘의 나는 살아가는 존재인가, 아니면 스쳐 간 순간들을 그러모으며 죽어가는 존재인가. 그날의 파도 소리는 지금까지도 내 안에서 질문의 메아리가 되어 맴돌고 있다. 목적지가 죽음으로 정해져 있다면, 그 과정은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엿볼 수 있었다. 친구 누나의 결혼식에서였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그토록 기다렸던 오늘이 와서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과거의 어느 날부터 미래인 오늘을 희망으로 손꼽아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수많은 사람의 축하 속에서 신랑과 신부는 “어떤 역경이 찾아와도 함께 행복한 미래를 그려나가겠다”라고 맹세했다. 그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약속이 아니었다. 앞으로 닥쳐올지 모를 미지의 어둠 속에서도 기꺼이 서로의 빛이 되어주겠다는 믿음의 선포였다. 반짝이는 별들이 내려앉은 듯한 그들의 눈을 보며 생각했다. 저것이 바로 ‘살아가는 것’의 모습이 아닐까. 정해진 결말이 무엇이든, 지금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희망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약속하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죽음의 그림자를 이겨내는 생명의 힘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정반대의 기억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한때 웃음이 동반자 같았던 친구는, 어떤 사건을 겪은 뒤 웃음을 잃어버렸다. 그는 매일 ‘그때 그러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곁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는 내게 “죽어가는 기분이라 고통스럽다”라며 존재하지 않는 위협에 불안해했다. 그가 말하는 위협은 바깥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친구를 삼키고 있던 것은 스스로 만들어낸 과거라는 악몽이었고, 그 악몽은 희망이라는 해독제 없이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괴물이었다. 희망을 잃고 과거에 갇힌 영혼은, 숨을 쉬고 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고통 앞에서 무력했고, 살아간다는 것과 죽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경계 위에 서 있는지를 절감해야 했다.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삶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지도 모른다. 봄의 벚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뿌릴 때 우리는 ‘살아나고’, 열정 가득한 여름의 태양 아래 시련의 비를 견뎌내며 성장한다. 가을이 되어 지난날의 열매를 거두고 아름다운 낙엽을 보며 삶의 성숙을 느낄 때 우리는 충만하게 ‘살아있지만’, 곧이어 모든 것이 저무는 쓸쓸함 속에서 마지막을 준비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겨울의 침묵 속에서 우리는 ‘죽어가는’ 듯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 죽음 같은 고요함 속에서 생명은 조용히 다시 돌아올 봄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죽어가는 듯한 시간조차도, 다시 살아나기 위한 과정의 일부가 아닐까. 웃음을 잃었던 내 친구의 겨울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라 믿고 싶다.
어느 날 TV에서 한 박사가 말했다. “삶을 ‘숙제’가 아닌 ‘축제’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는 스무 살엔 대학에 가고, 서른 즈음엔 결혼해야 한다는 사회의 정해진 틀에 갇혀 살아간다. 그렇게 나를 잃어버린 채 숫자와 순서에 맞춰 숙제를 해치우는 삶을 과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삶의 신비를 잊은 채 그저 하루하루를 의무처럼 버텨내는 것에 가깝다. 어쩌면 삶이란 주어진 ‘숙제’가 아니라, 각자에게 허락된 단 한 번의 ‘축제’이자 고유한 소명일지도 모른다. 그 부르심은 성공의 정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깊은 고뇌의 순간에 들려오는 것일 테다.
제주도 바닷가에서 소녀가 던졌던 질문이 다시 귓가에 맴돈다. 그날 ‘나‘는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기나긴 고민의 시간을 지나온 지금, 이제는 어렴풋이 나만의 답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도,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매 순간의 선택이다. 내가 ‘살아내기’로 또는 ‘죽어가기’로 선택하는 마음들의 연속일 뿐이다. 그리고 힘겨운 순간에도, 절망의 겨울 속에서도, 다시 봄이 올 것을 믿으며 삶을 축제로 만들어보려는 용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이자 소명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나의 삶을 주어진 숙제처럼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축제로서 기꺼이 살아내려 한다. 비록 그 축제가 때로는 눈물과 고통으로 얼룩질지라도, 그 모든 순간을 끌어안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노래를 부르려 한다. 그것이 나의 ‘낮은 찬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