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연락이 긴 자리에 남은 연필 한 자루
불안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연남동 데이트 이후, 에프터 약속까지 잡혔다. 모든 게 잘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흐름을 스스로 끊었다.
어느 밤,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의 나는 준비가 안 된 것 같다고. 너무 초라한 것 같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용기가 아니었다. 도망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녀의 문자가 왔다.
[오빠, 생각해 봤는데... 지금 내 상황이 연애를 할 여유가 없는 것 같아. 미안해.]
그녀가 나쁜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내민 출구를 선택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주의 밤바다에서 시작된 우리의 짧은 계절이, 여기까지라는 것을.
[그래, 네 상황 이해해. 짧았지만 고마웠어. 너한테 배운 게 많아.]
태연한 척 답장을 전송하고 핸드폰을 엎어두었다. 방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책상 위에는 연남동에서 그녀가 선물로 건네주었던 연필 한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연필을 가만히 쥐어보았다. 당당하게 자신의 명함을 내밀던 그녀의 반짝이던 눈빛이 떠올랐다.
그녀는 저 높은 곳에서 저토록 치열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도대체 이 멈춘 방 안에서 뭘 하고 있는 걸까. 밑바닥까지 처박힌 초라함이 밀려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남긴 연필을 필통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동네 서점의 문을 열고 들어가, 가장 두꺼운 편입 영어 책을 집어 들었다.
멈춰 있던 나의 시간이, 비로소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