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기득권이 가장 편하게 휘두르는 낙인인가
※ 이 글은 상업적 의도가 아닌 공익적 문제 제기를 목적으로 합니다. 글의 발상은 개인적인 통찰에서 비롯되었으나, 구체적인 출저와 전문적 맥락은 AI 보조 도구의 도움을 받아 심화되었습니다. 만약 이러한 도구가 없었다면, 필자는 여기까지 도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반지성주의는 나쁘다고들 말한다.
대체로 맞는 말이다.
검증을 싫어하고, 사실보다 확신을 앞세우며, 불편한 현실을 음모론이나 선동으로 덮어버리는 태도는 분명 위험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정작 이 말을 가장 능숙하게 휘두르는 쪽이, 기술의 이름으로 인간을 밀어내고 합리성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관리하며 전문성의 이름으로 책임을 유예해온 집단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정말 문제인 것은 반지성주의인가, 아니면 반지성주의라는 낙인을 가장 편리하게 사용하는 권력인가.
나는 반지성주의를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반지성주의가 왜 자라나는지, 왜 이 사회에서 쉽게 번지는지, 그리고 왜 그 단어가 실제 문제를 덮는 방패처럼 쓰이게 되었는지를 묻고 싶다.
오늘날 많은 경우, 사람들은 지성 자체를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이름을 빌린 권력에 분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생각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다.
현실을 더 잘 이해하고 싶어 하고, 속지 않고 싶어 하며, 자기 삶을 결정하는 구조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이 질린 것은 다른 것이다.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판단만 강요하는 전문가, 삶을 비용과 수치로만 계산하는 제도, 기술 발전의 과실은 위로 집중시키고 그 비용은 아래로 떠넘기는 시스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합리성이라고 부르는 언어 말이다.
이 지점에서 많은 분노는 무식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현실을 견딘 끝에 생긴다.
기술은 발전했고 생산성은 늘었으며 정보 접근성도 확대되었다.
그런데 왜 다수의 삶은 더 불안정해졌는가.
왜 자동화는 노동을 해방시키기보다 해고 압박부터 가져오는가.
왜 연결의 기술은 강화되는데 인간은 더 고립되는가.
왜 사회 전체의 부는 커지는데 체감되는 미래는 더 좁아지는가.
이 질문은 반지성적인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불편하다.
이 질문은 기술 그 자체보다 기술을 배치한 권력 구조를 겨누고, 전문가 개인보다 전문가 집단이 속한 제도의 책임을 묻고, 지식의 축적보다 지식의 사회적 사용 방식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불편한 질문들은 쉽게 반지성주의라는 이름 아래 밀려난다.
전문가를 의심하면 미개한 군중처럼 취급되고, 기술 낙관론에 제동을 걸면 시대착오적인 사람처럼 분류된다.
지식과 자본의 결탁을 비판하면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감정적 반응으로 축소된다.
그 결과 남는 것은 하나다.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만 문제적인 존재가 되고, 권위가 실제로 어떤 실패를 낳았는지는 뒤로 밀린다.
여기서 묻게 된다.
대체 누가 더 반이성적인가.
삶이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더 적응하라고만 말하는 체계, 효율의 이름으로 인간을 교체 가능한 부품으로 취급하는 질서, 자신들이 만든 불평등을 구조 문제라며 중성화한 뒤 그 구조에 분노하는 이들만 반지성주의자라고 낙인찍는 담론.
이것이야말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지적 비겁함 아닐까.
오늘날 “반지성주의”라는 말은 종종 사실 판단의 기준을 지키기 위한 경고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불신을 무력화하기 위한 훈육의 언어로 쓰인다.
너는 너무 감정적이다.
너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너는 전문가를 의심할 자격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구조의 실패는 개인의 태도 문제로 바뀌고, 공적 책임은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가장 교묘한 일은 지성과 권위가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둘은 다르다.
지성은 검증하고, 의심하고, 수정하는 능력이다.
권위는 복종을 요구한다.
지성은 스스로 틀릴 가능성을 열어두지만, 권위는 틀렸을 때도 체면을 먼저 지키려 한다.
지성은 공적 책임과 함께 설 때 힘을 가지지만, 권위는 책임 없이도 작동할 수 있다.
문제는 현대 사회가 이 둘을 너무 오래 섞어 써왔다는 데 있다.
전문성이 곧 정당성인 것처럼 말하고, 데이터가 곧 정의인 것처럼 말하며, 기술적 효율이 곧 사회적 선인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효율은 방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기술은 책임을 대신 지지 못한다.
전문성은 공공성을 자동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누군가 매우 정교하게 계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결과가 인간적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계산이 정교할수록 비용 전가는 더 은밀해지고, 통제가 효율적일수록 책임 소재는 더 흐려진다.
알고리즘은 중립인 척하지만 누군가의 기준을 내장하고, 플랫폼은 연결을 약속하지만 실은 종속을 설계하며, 자동화는 노동 해방의 언어를 쓰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해고와 감시의 언어로 먼저 도착한다.
이 과정 전체를 두고도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말은 늘 비슷하다.
시대 변화에 적응하라.
새 기술을 받아들여라.
전문가를 믿어라.
그러나 신뢰는 요구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존중도 강요한다고 회복되지 않는다.
공공의 신뢰는 설명 책임, 실패의 책임, 이익 배분의 책임을 함께 질 때만 생긴다.
현실을 망쳐놓고 태도만 교정하려 드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 반지성주의는 단지 무지의 산물이 아니라, 설명받지 못한 고통이 언어를 잃은 채 뒤틀린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여기서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
전문가 권위에 대한 비판과 사실 검증 자체에 대한 적대는 다르다.
지식 권력의 위선을 공격하는 것과 증거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도 다르다.
앞은 건강한 시민적 의심이지만, 뒤는 결국 더 저급한 선동과 더 조악한 권위주의로 흘러간다.
검증을 버린 사회는 평등해지지 않는다.
단지 더 쉽게 속고, 더 쉽게 동원되고, 더 쉽게 파괴될 뿐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반지성주의를 무조건 미개함으로 몰아붙이는 태도가 아니다.
그보다 먼저, 왜 많은 사람들이 전문가의 언어를 자기 편이라고 느끼지 못하게 되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왜 기술 발전이 축복이 아니라 탈락의 통보처럼 들리게 되었는지 물어야 한다.
왜 합리성이라는 말이 설득보다 체념을 먼저 강요하는 언어가 되었는지 점검해야 한다.
이 질문을 외면한 채 반지성주의만 욕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책임 회피다.
공익의 관점에서 더 위험한 것은 대중의 불신 자체가 아니다.
정말 위험한 것은 그 불신을 낳은 구조를 방치하는 일이다.
사람들이 제도와 전문가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먼저 그들을 훈계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이 그 불신을 낳았는지 분석하고, 어디서 공적 책임이 붕괴했는지 공개하고, 누가 기술과 제도의 이익을 독점했는지 투명하게 드러내는 일이다.
신뢰는 계몽으로 복원되지 않는다.
신뢰는 정의롭게 작동하는 구조가 있을 때만 돌아온다.
그래서 반지성주의를 막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반지성주의를 욕하는 것부터 멈춰야 할지 모른다.
적어도 그 단어를 자동반사처럼 꺼내는 습관은 버려야 한다.
누군가 전문가를 의심한다고 해서 곧장 무지의 편으로 밀어넣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기술 발전이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말할 때, 그 말을 낙인으로 봉합하지 말고 실제 구조를 따져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회의와 파괴적 냉소를 구분할 수 있다.
그래야 공공의 언어가 다시 복원될 수 있다.
결국 문제는 이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문제는 이성이 누구의 편에 서 있었느냐는 것이다.
지성이 공익을 위해 작동하지 않고, 권력의 비용 계산서로만 기능할 때 사람들은 지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중의 일탈이 아니라, 지성이 먼저 자기 책무를 배반한 결과일 수 있다.
반지성주의는 분명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지성의 이름으로 현실을 배신하는 태도, 전문성의 이름으로 책임을 미루는 제도, 합리성의 이름으로 불평등을 관리하는 구조다.
이것이 바뀌지 않는 한, 반지성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계속해서 다른 이름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사회가 해야 할 일은 단순하지 않다.
지성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이 다시 공공의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스스로 증명하게 만드는 일이다.
전문가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가 공적 책임을 실제로 지고 있는지 묻는 일이다.
기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탈락시키는지 끝까지 따지는 일이다.
그래야만 반지성주의도 줄어든다.
그래야만 지성도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그래야만 합리성이라는 말이 더 이상 약자에게만 희생을 요구하는 언어가 아니라,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공적 원칙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중을 얕보는 교정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지성을 다시 인간의 편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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