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직장 내에서 자리를 옮겼다. 파견형식의 사업부서에서 본사로 들어가는 거였는데, 출퇴근 거리가 꽤 되었다. 도보로도 왕복 2시간이 되지 않았던 이전 거리에서 지금은 편도 2시간이 채 못되는 거리가 되었다. 결론은 출퇴근으로 소비되는 시간이 대략 왕복 4시간. 퇴사를 해야 하나 고민이 살짝되는 거리긴 했다. 하지만, 왕따로 살았던 1년간 '악으로, 깡으로'만 남아서 일단은 되는 대로 다녀보자 싶었다. 직장을 수없이 옮겨다닌 내가 까짓 퇴사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막말로 바로 퇴사해도 갈 데는 아직 있어 보였고, 새로운 직업에 도전하는 것도 아직은 가능한 나이다. 직업이 많았던 것이 이제와서 이렇게 마인드에 도움이 될 줄 몰랐다. 그런데 막상 옮긴 자리는 이전에 있던 곳에 비해 나았다. 왕복 4시간이라는 출퇴근 시간이 유일하게 걸림돌이란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나를 왕따시킨 하찮은 것들과 물리적으로 멀어지니 숨쉬는 게 편안해졌다. 물론 옮겨간 곳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인간은 한 둘이 있었지만, 지난 1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는 편안하게 살만도 할 법한데, 내 위기 레이더가 속삭였다.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이지만 절대 안주하지 말라고.
위기의식은 내 체중 변화에서 벌써 느껴졌다. 잠도 제대로 못자고 왕복 4시간 동안 버스와 지하철에서 시달리는데 외려 체중이 늘어만 갔다. 어느 정도였냐면, 한달도 안되서 당장 PT를 시작할 정도였다. 비교적 저렴한 회사 동네 헬스장을 뒤로 하고, AI관련 스터디를 하는 장소에서 다소 비싼 비용을 지출했다. 운동은 집근처에서 해야한다는 게 지론이지만 근처는 모두 비쌌다. 사실 지금의 헬스장도 할인행사를 하는 게 아니면 부담되는 수준이었지만, 그나마 여성전용이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운동을 해서 좋긴 한데, 예상치 못한 지출로 가계부가 펑크났다. 마이너스 통장이 오랜만에 제 할 일을 해서 위기 신호가 하나 더 생겼다.
내가 하는 일에서는 더 큰 신호가 왔다.
지난 해 하반기부터 공부해 오는 AI쪽은 따라 잡기 어려울 정도로 업데이트가 빨랐다. 그런데 피곤하다는 이유로 잠시 등한시 했더니 그새 뒤쳐지는 것 같았다. 직장에서 자리를 옮기기 전부터 스터디도 하고 소모임 강의도 나가고 했는데, 발전 없이 제자리를 맴도는 느낌이었다. 마침 한 사이트에서 동영상 강의 의뢰가 왔다. 이 브런치스토리 글을 보고 AI관련 콘텐츠 한 부분을 맡아 보란 제안이었다. 나는 이런 종류의 제안을 놓치면 도태된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히 덥썩 물었다. 그런데 동영상 '촬영'이란 말에 좌절할 뻔 했다. 원래도 영상이나 사진 빨이 좋지 않은데 인생 최고점을 찍은 체중으로 기록물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내 잔머리가 쓸만한지, AI관련 콘텐츠이니까 AI를 활용해서 직접 영상을 만들어 보겠다고 제안했다. 다행히 바로 수락받았다.
그러나 좋다고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늘 1분 언저리의 영상을 만들다가 2시간 짜리를 만들려 하니 일단 막막하긴 했다. 스터디 멤버들이나 수강생에게 아이디어를 모았다. 한 스터디 멤버는 이미 동영상으로 강의하는 강사셨는데 자신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풀어주었다. 나 역시 그 분의 강의에 추가로 필요한 부분을 성심껏 피드백해 드렸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튼 영상 제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속도가 좀 느렸다. 왕복 4시간을 길에서 뿌리고 있는 와중에 회사에서 갑자기 사내 CS교육을 맡아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동영상 제작은 집에서 잠깐 머무는 시간에 잠을 포기하고 작업을 하느냐, 아니면 주말의 휴식 시간을 날리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어느 훌륭한 분의 말처럼, 위기의 또다른 말은 기회라고 여긴다. 업체에서 개인적으로 의뢰한 동영상 제작보다는 회사에서 의뢰한 사내 CS교육을 먼저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회사는 ERP 솔루션 회사로, IT회사였다. 그래서 일반적인 CS교육을 하는 것보다 AI가 살짝 묻은 CS교육을 해 보고 싶었다. 아예 강의 내용에 ChatGPT를 활용한 CS업무의 편리함을 제시하고 템플릿도 만들어서 제공했다. 강의 중에 잠깐 사용할 영상도 AI로 제작했다. 불과 몇 십초에 지나지 않는 영상을 제작하면서 업체에서 의뢰한 동영상에 적용할 아이디어를 얻었다.
내가 정기 구독하는 사이트는 ChatGPT와 Adobe, 이렇게 두 개 뿐이다. 가끔 비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사이트가 2~3개 정도 있지만, 이번 동영상 제작에서는 두 개의 사이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료 버전을 사용했다. 아직까지는 무료 버전만 가지고도 이런 저런 일을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영상 제작을 마칠 즈음 유료 버전이 강화되는 일이 사이트 곳곳에 생겼거나 생길 조짐이 보였다. 이것도 하나의 위기 신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멈추느냐, 나아가느냐에 따라 AI 리터러시 격차가 어마무시하게 벌어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무료 버전의 범위가 넓어서 얼마든지 테스트하고 강의하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유료 버전의 범위를 넓히지 않으면 강의 전 테스트 조차 힘들어질 지 모른다. 나에게는 이 부분이 체중보다 더 큰 위기로 다가온다.
사실 내가 속한 회사에 대한 위기 신호도 내게는 크게 다가온다. 지금이야 갑자기 조직이 크고 일이 기하급수로 늘어나니까 채용이 늘고 있지만, 조만간 그중 대다수가 집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조만간 내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회사가 어려워 질수도 있기 때문이다. IT쪽에 있다보니 직원의 대부분이 개발자로 근무하고 있다. 그러나 AI가 가장 먼저 빠르게 장악해 나가는 것이 개발쪽이다. 지금이야 내부 보안 등의 사유로 사람인 개발자가 대거 필요하지만, 조만간 내부 보안에 강한 AI 개발자가 완성되면 어떻게 될까?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 대표님도 머리가 아플 것이다. 나 역시 이 회사가 선택과 집중을 명확히 하지 못해 흔들린다면 불안한 위치긴 마찬가지다. 심지어 '사내 문화 발전'의 성공여부에 따라 조직이 어떻게 될 지 보이는 입장에서는 위기 신호도 너무나 명확하게 보인다.
한편으론, 이 위기 신호가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안주하려 드는 생활 속에서 내 얼마 없는 근력은 바닥을 보이고, 체중이 생애 최고점을 찍었다. 미관상 나쁜 것은 둘째 치고 맞는 옷이 없어서 옷을 구매해야 하는데 어중간한 사이즈라 쇼핑 자체가 난관이었다. 체중이 늘면서 게으름도 느니까 체력이 바닥을 뚫고 내려갔다. 결국 총체적 난국의 건강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 신호는위기가 찾아오기 전에 먼저 알림벨 역할을 한다. 그걸 무시하지 않아야 살 수 있다. 다행히 나는 몇 번 무시한 신호의 마지막은 잡은 것 같다. 아직까지 2시간 강의가 가능한 것을 보니까 말이다. 이제 체중을 잘 조절해서 아픈 무릎을 보호해야하는 과제가 남았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위기 신호를 잘 캐치한 덕분에 미루고 미뤘던 전자책을 완성하고 2시간 동영상 하나도 건졌다. 이렇게 브런치스토리도 다시 생각나서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니까, 내가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잘 가고 있구나 싶어서 잠깐 안도가 들기도 했다. 여전히 내가 어쩔 수 없는 회사 쪽은 위기 의식이 계속 들고 있지만, 이 또한 해결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동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잘 하면 된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 위기 신호와 위기 의식이 나를 N잡러로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분명 작년까지는 어느어느 회사에서 무엇을 가르치는 누구입니다가 자기소개의 전부였다. 그런데 오늘 '크몽'에 전자책을 올리면서 자기 소개를 하는데, 나의 직업이 강사이자, 작가이고, 이제는 크리에이터까지 붙게 되었다. 이만하면 스물 두 번째 직업에 도전해서 성과를 보고 있는 게 맞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