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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선용 Aug 14. 2023

죽어가서 무력화된 인간- 콘크리트 유토피아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리뷰


살고 있던 공간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진이 난 후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을 보여준다.


*본 글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민성(박서준)과 명화(박보영)가 등장한다. 사람들이 보급을 받고 있다. 1층에 화재가 나는데, 영탁(이병헌)이 나서서 불을 끈다. 앞으로 지속될 재난 상황에 황궁 아파트 주민 사람들은 마을 긴급회의를 하고, 대표자를 뽑기로 한다. 영탁은 화재로부터 아파트를 지켰다는 점에서 만장일치로 아파트 대표가 된다.


아파트 사람들은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을 내보낼지 회의를 하는데, 내보내자는 하얀 바둑돌, 같이 지내자는 검은 바둑돌로 익명 투표를 진행한다. 투표 결과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은 내보내기로 한다. 이후 아파트 사람들은 규칙을 만들어서 살아간다.


1번째 규칙은 주민인 사람만이 아파트에서 살 것.





과거를 보여주는 것



민성이 외부인을 막기 위해 무기를 챙기려고 옷장의 철 막대기를 꺼내 드는 순간은 현재다. 과거에 처음 지진이 발생하기 직전, 민성은, 차에 깔린 한 여성을 구해주려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지진을 보고 도망갔지만, 민성은 마지막까지 여성을 구하려다가, 그제야 엄청난 지진을 보고 도망친다. 차 안으로 들어가 안전벨트를 맨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는 그 여성과 눈이 마주치고, 민성은 안전벨트를 풀고 그 여성을 구출하러 가려고 한다. 그 순간 엄청난 지진으로 민성이 탄 차는 흔들리고, 자연이 인간의 인공적인 콘크리트 건축물들이 마음에 들지 않기라도 하듯 온갖 건물들이 무너지고 뒤섞인다.


민성의 누군가를 도와주려던 손은, 누군가를 위협할 수 있는 무기를 드는 손으로 바뀐다.


아파트 사람들은 방범대를 만들어서 식량을 찾아 나선다. 수확이 꽤 되어서 파티를 열던 밤, 영탁이 노래 부르는 순간은, 영탁이 사람을 죽이고 지진이 난 그날로 돌아간다. 카메라는 영탁의 얼굴을 클로즈업 샷으로 비춘다.


재난 영화에서 과거를 되돌아보는 것은 보통, 후회나 그리움이다. 그러나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과거를 등장인물이 그리운 회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관객에게 과거를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억지로 과거의 서사를 들추지 않는다. 지진이 난 순간, 또는 그 직전만을 과거로써 보여준다. 과거에서 아름답고 빛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콘크리트로 된 건물들과 그 주변 풍경이다. 택시 기사인 영탁이 운전을 하고 지나가는 풍경 속 건물들은 아름답다. 이 이외의 인물들의 아름답거나 그립고 서글픈, 과거 이야기는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의 짤막한 통화와, 가족사진으로 가족의 짙은 그리움을 강조할 뿐이다.


과거에 우발적으로 사람을 죽여 충격을 받은 듯한 영탁의 표정은, 현재 아파트 대표가 되어 노래를 부르며 웃는 얼굴로 바뀐다.





황궁 아파트 대표, 김영탁


사람을 죽인 김영탁은, 지진 이후 황궁 아파트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대표가 된다. 그들의 첫 번째 규칙은 주민인 사람만이 아파트에서 살 것. 그러나 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놀랍게도 아파트 대표인 영탁이다. 영탁은 원래 황궁 아파트 주민이 아니었다. 진짜 김영탁을 죽이고 자신이 영탁인 척 행동한 것이다. 혜원과 명화의 행동으로, 영탁의 진실은 밝혀진다.


황궁 아파트 주민 사람들은 분명 자신들이 바둑알로 선택해서 주민이 아닌 마을 사람들을 내쫓아서 죽음에 이르게 했으면서, 대표가 가짜 김영탁 임이 드러나자, 모든 것을 대표의 탓으로 돌린다. 대표를 그 자리에서 내리려고 했던 명화의 행동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대표뿐만 아니라 황궁 아파트 사람들 모두의 영향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표가 가짜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혼돈에 빠진다.



진실이 드러났지만, 그것보다 더 끔찍한 일들은 동시에 벌어진다. 대표는 자신이 가짜임이 들켜지자, 비밀을 밝힌 혜원을 쫓아가서 혜원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린다. 내가 죽일 사람들과 살리려는 사람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그러나 이후 가짜 김영탁은 구역질을 한다. 그도 사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힘들어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 누구보다 가짜 김영탁은 대표로서 사람들이 살아 나갈 수 있도록 진심을 다해 나서는 인물이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방범 활동을 나갈 때도 외부인과 맞서 싸우고, 총을 들기도 하며 먼저 도망치는 사람이 아닌, 정말로 나서서 행동하는 사람이었기에 모순적인 캐릭터로 존재한다. 그는 공동체를 살리려는 동시에, 개개인을 파멸시키는 행위를 서슴없이 한다.





흰 바둑돌과 검은 바둑돌 – 따르거나 떠나거나


영화에서는 바둑알이 중요한 순간에 등장한다.


먼저, 황궁 아파트 대표인 가짜 김영탁이 진짜 김영탁을 죽일 때, 바둑돌이 사용된다. 우발적 살인이었으나, 가짜 김영탁이 살인에 사용한 것은 흰 돌과 검은 돌 모두이다. 김영탁의 살인은 흑과 백, 즉 선과 악을 명확히 판단할 수 없는 행위였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황궁 아파트 주민 사람들은 다수결로 바둑알을 선택해서 주민이 아닌 마을 사람들을 아파트에서 내쫓기로 했었다. 흰색 알은 그들을 나가게 하는 것, 검은 알은 그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득표로, 아파트 주민이 아닌 사람들을 내쫓는다.


살아남은 황궁 아파트 사람들의 생존 규칙은 다음과 같다. 따르거나, 떠나거나.


흰 돌과 검은 돌은 따르거나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는 곧, 살아남거나 죽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파트 외부로 쫓겨난 사람들은 거의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후반부로 가서는, 떠나는 것이 살아남는 것을 의미한다. 살거나 죽는 문제는 하얗고 검은 바둑돌처럼 명확한 문제이지만, 아파트에 남는 것이 명확히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진으로 엉망이 된 도시와 달리, 황궁 아파트에 있던 바둑돌은 지진으로부터 안전하게 남아, 사람들로부터 살아남고 죽는 문제를 결정하는 데 사용된다. 살고 죽는 문제는 자연으로 일어난 재난일 수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처절한 일일 수도 있다.



타인을 배척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지진이라는 재난 앞에, 한정된 식량 앞에서 아파트 사람들은 불안감에 계속 배척하고자 하는 마음만을 키워 나가고, 우려했던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다른 문제로 사람들이 죽어간다. 서로 싸우고, 소중한 가족을 잃어 살아갈 의지를 잃고, 소중한 사람들을 계속 잃어간다.


주인공의 죽음 또는 살아남음은 결말로 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이다. 죽거나 사는 것은 하얗고 검은 바둑돌처럼 확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에 억지로 절절한 서사를 만들지 않는다. 관객이 보는 서사는, 주인공들의 현재와 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혹은 그 당시의 재난 상황으로써의 과거일 뿐이었다. 등장인물과 등장인물 사이의 관계는 지진 이후 현재에서만 직접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마지막에, 영탁은 죽어 있는지, 곧 죽어가는 사람인지, 죽어서 상관없는지, 그러한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일까. 죽어가는 영탁을, 침입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결국 죽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가 말하는 죽음이란 무엇인가?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처럼, 죽어가서 무력화된 인간에 대해서도 말한다. 표면적으로는 초반에 황궁 아파트 주민이 아닌 마을 사람들이 아파트에서 내쫓길 때, 그들은 무력화된다. 아파트 외부인 중 국회의원 또한 무력하게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이는 인간이 살아있는 기본적인 상태로 의식주를 잃으면 그냥 죽게 되는, 재난 앞에서 무력하고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죽는다는 것은 이처럼 내쫓기는 것이 될 수도 있으며, 방치되거나 무시당하는 것일 수 있으며,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 속에서 방범대가 식량을 구하러 가는 장면은 그러한 죽음을 보여준다. 방범하던 도중, 외부인의 위협으로 민성은 쇠 파이프를 휘두른다. 쇠 파이프를 맞은 외부인을 영탁이 죽기 직전까지 때리고, 그들의 식량을 전부 가지고 오는데, 그의 아내와 아이는 곧 죽을 것이 분명하다. 식량과 그들을 지킬 남편이 없으므로.





집과 공동체가 가지는 함의



집은 이들에게 무슨 의미인가? 온전한 집으로서 황궁 아파트가 남아있다는 사실은 집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사실, 집이 다 부서져 나가도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다.


마지막에 명화가 찾아간 집은, 옆으로 쓰러져 있는 건물이었다. 외부인들은 일반적인 집 형태가 아닌 곳에서도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몇몇 사람들이 황궁 아파트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인가? 다 부서진 집들 사이에서 황궁 아파트는 온전해 보이는 주거지였다. 그러나 재난 사이에서 온전한 형태의 집에 대한 집착은 파멸로 향한다.


지진은 이미 끝났다. 지진이 끝난 후 남아있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공동체가 생기면 그 힘이 생겨서 보다 생명력이 강해지기도 하지만, 식량이 없는 환경에서 큰 공동체는 그만큼 더 큰 위험을 안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타인에게 따뜻한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죽음이 구역질 나고 슬프면서 우리에게 큰 공허한 상실을 안겨주는 것이지만, 이러한 죽음이 반복된다면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슬픔을 느낄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재난으로부터 도망치는 이들의 모습보다는, 지진이 끝난 후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 보여준다. 우리는 재난에 어떻게 대응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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