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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글쓰기

안태환의 의학오디세이

보잘것없는 글로서 실명 칼럼을 쓰는 처지에 그녀의 존재는 민망하다. 모든 미디어와 만남을 거부하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오직 작품으로만, 필명으로만 드러내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엘레나 페란테가 그렇다. 그녀의 책 『글쓰기의 고통과 즐거움』의 속 강렬한 한 문장, “글쓰기는 과거의 모든 글을 정복하고, 서서히 그 엄청난 자산을 쓰는 법을 배워나가는 과정입니다.” 다른 이들이 쓴 것을 취합해 자아의 틀 안에서 자신의 것을 만드는 역사 속 과정이 글쓰기라는 것이다. 그녀의 지혜가 지극히 온당한 이유는 모든 글에는 인류 문명의 기나긴 역사가 나이테처럼 스며있기 때문이다. 독서가 글쓰기의 듬직한 밑천인 이유이다.


아픈 환자를 대하며 체득한 진실 중에는 언어의 체온이 높을수록 환자와의 교감은 수월하다는 것이다. 따듯한 미소와 세심한 배려가 묻어나는 언어는 통증과 좌절을 포용하고 치료의 예후도 좋다. 의사로서 글쓰기의 고된 노동을 감내하게 된 배경에는 개츠비의 사려 깊은 미소를 묘사한 프랜시스 스콧 키 피츠제럴드의 따듯한 문장이 출발점이었다. 그의 배려 깊은 글을 환자와의 대면에서 의사의 언어로 체화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페란테의 조언대로 문명의 기록을 부단하게 살펴봐야 한다. 쉼표 없이 가파른 호흡의 의료현장 속에 쉽지 않은 일이다.



피츠제럴드에게서 문명의 지혜와 영감을 얻고 조지 오웰에게 현실 직시의 힘을 느꼈으며 김훈의 1990년대 문장 안에서 매혹을 느낀 세대의 한계는 분명하다. 문학적 문어체의 세계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 사이의 언문일치가 이뤄진 세계 속에서만이 글쓰기의 온전한 채비가 이뤄진다는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역설적이게도 의사만큼 글쓰기에 최적화된 노동조건은 흔치 않을듯싶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의료현장의 풍경이 인류의 역사이며 통증 앞에 희망을 갈구하는 환자와의 대화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간 존엄의 역사이니 말이다. 의사만큼 고귀한 생명의 최전선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을까 싶다.


따지고 보면 의사의 글쓰기 가치는 글로써 유명해지기보단 유일해지는 것이 올바른 방향일 것이다. 유일하다는 건 다양성과 희소성 측면에서 나아가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 공동체에 필요하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의사로서의 삶과 태도에 관한 이야기가 글의 주류를 이루더라도 아픈 환자를 위로하듯 삶을 위로하고 현재의 우리 삶과 태도에 맞닿는 생명에 대한 고귀한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의사의 글쓰기는 매우 효용적이다.


삶은 의미는 거창한 담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의사가 마주하는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건네는 미소와 친절, 고통의 교감, 그리고 생명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놓지 않는 진심 어린 관계 맺음에서 시작된다. 글쓰기를 통해 그 의미를 자각할 수 있다니 이보다 가성비 좋은 노동이 어디 있을까 싶다. 거기에 더해 타인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은 의사의 글쓰기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상의 루틴이 있다.  그러나 의사의 일상은 변화무쌍하다. 예기치 않은 순간과 매일같이 당혹스럽게 마주한다. 사실 글쓰기는 어디서든 멈춤의 순간에 생각을 기록한 후 발효식품처럼 숙성했다 쓴다. 루틴이 있다는 건 글쓰기의 기반이 안정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록할 여력도 숙성할 시간도 없다는 건 글쓰기의 기반이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그 공고한 턱을 넘어서기 위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의사의 글쓰기가 당위성에 반해 고되다는 변명이라 해두자.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의사의 글쓰기 동력은 자가면역력이다. 외부로부터 얻은 마음의 상처에 굴하지 않는 태도이다. 의료현장에서 부지불식간에 생겨난 흉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이다. 그러다 보면 내면의 힘은 단단해지고 반듯한 의료 철학으로 의사와 환자의 교감을 얻기 위한 지혜를 글로 기록할 힘이 생긴다.


니코즈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 힘의 원동력이었다. 의사로서의 좌표를 확인해준 글이었다. 이념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온전한 자신에 집중하며 불합리한 상황에 당당히 맞서라고 말하는 조르바의 삶은 의료현장에서 질곡의 시간을 헤쳐 온 담대한 위로였으며 환자에 대한 애정의 바탕이었다.


카잔차키스가 힘주어 말했던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그것은 박제된 윤리만을 추구하는 세상에 대한 항변이었다. 변하지 않은 가치가 있을 것인가. 변이하는 바이러스를 대하는 현대 의학의 경직성은 왜 비판받지 못하는가. 의술이 권위적이지 않아야 할 이러한 사유를 설명해야 한다면 의사의 글쓰기만큼 유효한 방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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