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안태환 리포트] 봄날의 미술관

가뜩이나 마실도 부담스러운 근간에 미술관 관람이라니, 뜬금없다 여길지 모르겠다. 훅하니 봄은 왔는데 겨우내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꼼지락거림이 생태적이라는 생각에 결행한 나들이였다. 마음 같아서는 흐르러지게 피어난 여의도 윤중로 벚꽃 구경을 가고 싶은데 그마저도 운에 의탁할 추첨제라는 소식에 포기했다. 그나마 사전예약이라는 차선책으로 우회한 덕수궁 미술관으로의 봄나들이였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란 전시 제목도 취향을 자극했다.  



‘날개’의 작가 이상은 경이로운 유작‘실화’에서“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이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라 했다. 어쩌면 온종일 환자와 마주하는 직업 특성상 미술의 곡선과 채색이 주는 정신적 편안함은 비밀스러운 나만의 위로였다. 딱히 그림에 소질이 없는 나로서는 심오한 미술작품에 심취하는 것만으로도 화가가 된 듯, 일종의 대리만족이었다. 문학이나 미술이나 저마다의 예술 영역은 표현 양식만 다를 뿐, 인간의 창조적 자유를 표현한 것이다. 예술의 영역 간 융합은 결국 호모 사피엔스 소통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궁색하지만 그 오묘한 관계에 끼어들 여지는 독서와 관람뿐이다. 나는 그 호사를 맘껏 누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은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전시관의 작품들이 이른바 꼰대 미술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1930년대를 전후로 한 한국 예술사의 빛나는 풍경들은 파노라마 필름처럼 연결돼 있었다. 문학사와 미술사는 그렇게 한 몸이 되어 2021년 봄날에 이르렀다. 문학을 보듬은 미술, 미술이 스며든 문학의 옹골진 협업은 주말 오후 시간 내내 발걸음을 머물게 했다. 덕수궁 입장료는 받았지만 미술관 관람료는 무료였다. 낯설지 않은 경험이었다. 몇 해 전 찾았던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입장료도 도네이션(donation) 이었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 미술관이 무료라니 경이로웠다. 'Donation Fee'는 해석 그대로 기부, 관람객이 원하는 만큼만 입장료를 지불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스스로의 기부 액수를 결정할 수 있다. 거저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술의 대중화에 단단히 기여하는 시스템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치하의 경성이라는 시공간 속에 문학과 예술에 헌신했던 예술가들의 부단한 삶의 이야기들은 관람 내내 귓전을 울렸다. 억압과 절망으로 점철된 일제강점기 시대, 부조리한 현실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민족과 공유했던 작가들의 열정은 전시장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었다. 미술, 그리고 문학은 일제에서 해방이 그랬듯이 그렇게 팬데믹의 시대도 마침내 지나갈 것이라 속삭이고 있었다.   



전시된 작품 중, 화가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은’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한 남성을 그렸다, 그림 속 주인공은 그의 가까운 친구였던 이상이었다. 그림 속 이상의 강렬한 눈빛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 보였다. 코로나19로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일상에 대한 위로의 주문 같았다.

작가의 이전글 [안태환의 의료인문학] 순댓국 찬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