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안태환의 건강 프레쉬] 꽃보다 아름다운 이름

꽃은 인간의 관계에서 아름다운 쓰임이 된다. 축하와 고마움을 대신하기도 하고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는 추모의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형형색색의 꽃으로 언어를 대신 에둘러 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때로는 야만의 권력에 저항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홀로도 아름다운 꽃은 무리지어 피어 날 때에는 더더욱 절정의 자태를 뽐내며 평화와 연대의 상징으로 만개한다.     



보낸 이의 정성이야 말할 나위 없이 귀하지만 화환은 때론 건조하다. 큼지막한 사람의 이름을 걸고 휘황찬란하게 꽃 치장을 했지만 격식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를 도드라지게 과시하는 화환을 보며 꽃의 자태에 감탄하는 이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꽃 한 송이 만나는 일도 발품을 팔지 않고서는 힘들다. 때론 담장 밑, 후미진 거리의 길섶에서 우연한 만남도 있겠지만 그 우연은 흔치 않다. 관계를 대신해주는 꽃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속씨식물의 생식기관인 꽃에는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이 투영된다. 인간의 감정 선에 잇닿아 있는 꽃은 그래서인지 사람 이름에도 유독 많이 쓰인다. 세계적으로 사람의 이름에 널리 쓰이는 이름은 아마 ‘나리’ 일 듯 싶다. 한국에서는 ‘나리’, 일본에서는 ‘유리’이며, 영어로는 ‘릴리’가 그렇다. 2008년도부터 한글 이름이 유행된 이후에는 ‘나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유독 많아졌다. 어감도 참 좋다. 꽃은 그렇게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 울 때 더 아름답다.        



‘이름’은 순우리말이다. ‘무엇이라고 말하다’라는 뜻의 동사 ‘이’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쓰임에 따라 평판이나 명성을 뜻하기도 한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름, 곧 다른 사람들이 나를 부르는 이름도 우리의 사람됨을 위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한 사람을 하나의 이름으로 부름으로써 그를 독립적 존재로 인정해준다. 반면 직책과 호칭은 사회적인 지위를 대변할 때가 많다. 지위에 대한 갈망은 호칭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 작가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인간의 가장 큰 불안은 자신이 원하는 지위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이라고 역설했다. 그의 또 다른 작품인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는 결혼한 한 커플의 삶을 통해 일상의 범주에 들어온 사랑에 대해 통찰한다. 평생을 함께할 확신이 드는 사람을 만났는데도 사랑의 위기가 빈번하고 더 크게 파멸을 맞기도 하는지에 대해 그는 “사랑은 열렬한 감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말로 응축된 유연한 사랑의 방식”이라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삭막하고 고단한 일상에서 유연한 사랑의 방식은 정형화된 관념이 아닌 친밀감의 일상화이다. 그 미더움에 꽃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자주 불러주는 것만큼 유연함이 어디 있으랴. 결혼 후 자녀의 이름이 호칭이 되는 아내에게 본래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알랭 드 보통의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은 실체적으로 구현된다.       



데일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은 세계적으로 6000만부가 넘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올린  책이다. 평소 인간의 차이를 반영하지 않은 자기 개발서를 탐탁하지 않게 여겨오던 차였지만 카네기의 인간 관계론은 보편적 인간의 본능에 부합되는 책이다. 카네기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들에게 진심을 가지고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주어라. 명료하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관심을 가져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큰 힘이 된다”고 역설한다.



시인 김춘수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으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의 이름을 불러 주는 일은 관계에서의 최고치인 듯싶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러주는 이름은 더 정겹다.     



나는 환자들의 이름을 부른다. ‘김쾌차님’, 더불어 직원들에게도 직책보다는 이름을 부른다. 그들이 불쾌해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꽃을 선물하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에서 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이 호칭의 전부였던 시절, 정신과 몸은 훌쩍 성장했지만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타자와의 거리는 유년의 기억으로 살포시 소환된다. 친근함은 배가된다. 존재는 위로받는다.      



난 그래서 오늘도 환자의 이름을 달달 외운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안태환의 의료인문학] 두개의 장마 그리고 인간의 태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