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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환의 의료인문학] 골상학의 편견


이름도 생소한 골상학은 의학계의 관점으로 본다면 유사과학이다. 200여 년 전 오스트리아 의사 프란츠 요제프 갈(Franz Joseph Gall)에 의해 처음 주창되었다. 비 과학의 정점, 인간의 혈액형으로 성격을 구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두개골에서 튀어나온 부분을 분석하여 뇌 기능을 판단하는 골상학은 놀랍게도 거의 50년간 과학의 영역에서 추앙받았다. 골상학이 터무니없는 논거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뇌의 특정 부위에 국한되는 지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골상학에 의해 오늘날 앞이마가 돌출된 소위 짱구머리인 이들이 공격적 성향을 드러낼 것이라고 규정한다면 이를 납득할 수 있을까.     



때론 샤머니즘적이기도 한 골상학이 유행하던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였다. 백인 우월주의가 그 근간에 자리하고 있다. 인종차별 외에도 사회적 소수자의 차별에 대한 합리화에도 골상학은 차용되었다. 믿기지 않는 야만의 시대이다.     



동양에서도 서양의 골상학과 유사한 개념은 존재했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위연의 반골(뒷머리가 튀어나온)을 보고 반드시 반역을 할 인물이라고 예측했다. 후에 위연은 공교롭게도 실제 반역을 일으키니 제갈량의 판단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삼국지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위연의 배신이 반골의 골상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고려 정치의 개혁에 앞장선 성리학자 이제현도 승려 신돈의 골상이 흉악하니 가까이하지 말 것을 공민왕에게 충언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후에 천도에 대한 의견 차이를 두고 파멸로 끝난 둘 사이를 생각한다면 정치적 결별이라 이해함이 합당하다. 역사 속 우리의 관상학도 과학적 토대는 부족했으니 서양의 골상학과 흡사했다. 편견의 시대이다.     



최근 들어서는 손가락 길이로 사람의 성격과 건강을 체크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을 놓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관한 논문만 1400여 편에 이른다. 그러나 많은 과학 평론가들은 우려한다. 손가락 즉, 검지?약지 비율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녀 간의 비율 차이가 남성의 큰 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는데, 과학적 기초 없이 손가락 길이에 의한 인간의 성격 규정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의 연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손가락 연구는 신뢰하기 힘든 골상학과 유사하다.     



잔혹한 리더십을 정당화시킨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의 기원이자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초상화는 골상학의 정점에 서있다. 음흉해 보이고 날카로워 보이며 흡사 여우를 닮은 그의 남겨진 초상화들은 사실 골상학에 근거한 가공된 이미지이다.     



골상학을 신봉하던 사람들의 눈에는 야심찬 마키아벨리를 선한 이미지로 그려낼 객관적 배려를 갖게 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위치한 우피치 미술관에 결려진 그의 초상화에는 오늘날에도 간혹 관람객들의 오물이 투척된다. 그에 대한 오인된 역사의 현실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사뭇 다를 수 있다. 후에 마키아벨리에 대해 글을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과학을 신봉하는 의사로서의 나는 현대 과학이 골상학이 범람하던 중세처럼 인식의 오류를 반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늘 생각한다. 어찌 인간을 타고난 골상으로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환자의 가족력과 환경, 나아가 마음을 살펴보지 못한 채 타고난 생김새로 환자의 성향과 질환을 규정한다면 어찌 인술을 펼친다 말할 수 있을까.     



골상학의 주창자가 의사였단 사실은 유감스럽다. 오염된 과학을 신봉한 것은 환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의사인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자기 객관화를 채비하는 일, 바른 치료의 첫걸음이다. 의료는 누가 뭐래도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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