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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칼리버 vs. 마스크

방역수칙의 준수는 시민의 의무...그 실천은 사회적 거리두기 준용과 마스크 착용          


누구나 한 번 즈음 들어본 서양 역사 속 인물, 영국의 아서(Arthur)왕. 중세 영국에서는 예수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영국 역사에 문외한이어도 아서왕에 얽힌 전설은 유년 시절 만화와 동화를 통해 친숙하다. 6세기경 영국, 켈트 출신인 아서왕의 신화 같은 이야기들은 역사가 되고 설화가 되기도 한다.     



아서왕과 뗄 수 없는 검, 엑스칼리버는 신화 속 그 어떤 무기보다 위대한 무기로 알려져 있다. 검의 신비한 마력은 유구한 천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물론, 일광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 명제는 예외 없지만 엑스칼리버의 신묘한 기능은 아서왕의 권위의 상징이 된 건 분명해 보인다.     



켈트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며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음은 물론이다. 잘 알려졌듯이 엑스칼리버는 바위에 깊이 박혀 있었다. 누구나 노력했지만 검을 바위에서 빼어 들지 못했다. 요지부동한 엑스칼리버를 아서왕이 뽑으므로 인해서 주인이 되었고, 궁극에는 왕이 될 수 있게 해주었다.     



뜬금없이 엑스칼리버 이야기를 꺼내든 이유는 팬데믹의 시대를 살며 마스크는 엑스칼리버이며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혼돈의 시대, 영웅으로 추앙받던 아서왕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해도 좋다. 마스크 너머 공기는 극도의 경계대상이자 두려움으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코로나19로부터 일 년 내내 지속된 공포는 급기야 대유행의 정점에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아서왕이 직면했던 전쟁의 위협이 코로나19로 치환된다면 백신이 오기까지 믿고 의지할 것은 마스크와 거리두기 뿐이다.     



마스크에게 엑스칼리버의 위용까진 기대하지 않더라도 확산일로에 놓인 불길한 외부 현실의 틈입을 차단해 주는 역할은 실로 튼실하다. 아니 의연하기까지 하다.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는 백신 이전의 마지막 겨울을 견뎌낼 방역과의 균형에 마크스가 있다. 이점은 분명하고 확고하다.     



모두가 지난하고 혼돈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있다. 하루에도 수차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의 확진자를 알리는 핸드폰 문자는 일상이 되었다. 애써 자세히 읽어보지도 않는 심드렁한 태도는 감염병의 무감각과 느슨함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렇게 대한민국 12월의 세밑은 차가워진 기온만큼이나 서늘한 시대를 고난스럽게 건너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글로벌 브랜드가 된 K 방역은 백두 간척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정부 발표대로라면 우리는 백신 구매 대열의 비교적 앞쪽에 있다. 그러나 접종이 있기까지 넘어서야 할 과제는 산적하다. 불과 얼마 전, 독감 백신 파동을 겪은 혼란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접종 전, 코로나19 확산에 결연하게 대응해야 한다. 일상의 자유는 천부의 권리이지만 공동체의 파괴를 제어할 방역수칙의 준수는 더 앞선 시민의 의무이다. 그 실천은 사회적 거리두기 준용과 마스크 착용이다.     



코로나19의 역설이라고 해도 좋다.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 이 겨울에 사랑하는 이들을 보다 더 잘 관찰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와 시간을 감염병이 강제했으니 말이다. 거리두기의 미학으로 승화하는 지혜 속에 마스크 한 장,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사회적 처세가 어디 있으랴. 마스크를 착용한 당신이 바로 엑스칼리버를 손에 쥔 아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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