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과 소유의 관계
反復美學(반복미학)~
사람들은 흔히 배우는 것을 ‘새로운 것을 아는 힘‘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일정한 나이에 이르면 알게 된다. 진짜 배움은 지식을 더하는 일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반복은 단순한 훈련이나 근성이 아니라 사유와 삶을 단련시키는 결정적 작용이 된다. 퇴계선생이 ’ 고문진보(古文真宝)’를 말하며 수백 번의 독서와 암송을 강조했다. 흔히 말하는 600독은 성취를 강요하는 구호가 아니라 소유로 이르기까지 필요한 시간의 깊이를 말한다. 한두 번 읽어서 이해하는 일은 가능하다. 열 번 읽으면 구조가 보인다. 그러나 반복이 누적되지 않으면 그 문장은 끝내 남의 말로 남는다. 공자는 논어의 첫 구절에 ‘学而時習 不亦說乎’라 했다. 여기서 습(習)은 단순한 복습이 아니다. ’ 날개를 퍼덕인다 ‘는 상형에서 알 수 있듯이, 습이란 배운 것을 삶 속에서 되풀이해 살아보는 것이다. 공자에게 배움은 머리에 남는 지식이 아니라, 몸과 태도로 스며드는 체화였다. 반복은 이해에서 멈추지 않는다. 반복은 문장을 몸에 붙이고, 판단을 반사처럼 만들며, 마침내 그 말을 쓰지 않아도 같은 사유가 나오는 상태로 이끈다. 이때 텍스트는 더 이상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근육이 된다. 반복은 기억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필요 없게 만드는 단계로 나아간다. 기억하지 않아도 말이 나오고, 떠올리지 않아도 태도가 드러날 때, 그 앎은 이미 소유(所有)가 된다. 반복은 복종이 아니라 탈피의 과정이다. 처음에는 흉내내기 시작하지만 일정 지점을 넘어서면 흉내는 거부감으로 바뀌고, 그 거부감 속에서 비로소 자기 어투와 자기 리듬이 출현한다. 반복은 동일화를 거쳐 차이를 낳는다. 오늘날 학습은 빠른 이해와 즉각적인 성과를 요구한다. 그러나 더 나은 성취는 언제나 느린 반복 속에서 나온다. 흔들리지 않는 판단, 정제된 표현, 상황에 맞게 작동하는 지혜는 단기간에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습(習)을 통과한 반복의 결과이다. 결국 반복이 만드는 것은 성과가 아니라 ’ 자기화된 능력‘이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반복은 지식을 눌리지 않는다. 반복은 타인의 말을 지우고, 그 자리에 나의 말을 남긴다.
2026 1월 丙午正初에~
獨楽齋에서 幽人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