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 지연 어쩌면 혈연까지~

존중과 판단사이에서

by diogenes

학연, 지연 어쩌면 혈연까지~

- 존중과 판단 사이에서 -

관계는 오랫동안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학연(學緣)•지연(地緣)그리고 혈연(血緣)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였고, 질문이 아니라 통과의 조건이었다. 그것들은 사회 속으로 진입하기 위한 암묵적 질서였으며, 개인의 판단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전화 한 통이면 절차는 생략되었고 설명은 불필요했다. 결정은 숙고의 결과가 아니라 연결의 결과로 도출되었다. 이 질서는 비상식이었지만 효율적이었다. 불공정했지만 편리했고 느린 합리보다 빠른 관계가 언제나 우선했다. 막스 베버(Max Weber)가 말한 근대의 합리적 질서는 개인에게 책임과 증명을 요구하지만, 관계 중심의 질서는 그 부담을 덜어준다. 전자는 불편하고 후자는 편하다. 그래서 합리는 늘 관계 속에서 후퇴해 왔다. 이는 일탈이 아니라, 합리적 지배가 완전히 정착되기 이전부터 지속되어 온 오래된 사회의 작동방식이다. 문제는 연(緣) 자체가 아니었다. 문제는 연이 판단을 대체하는 순간이었다. 관계가 신뢰가 되고 신뢰가 면책으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책임은 흩어진다. 그 안에서는 누구도 부당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모두가 누구의 선배이고 형님이며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판단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구조의 기능이 되고 개인은 결과에 편입된다. 이때 발생하는 문제는 악의가 아니라 사유(思惟)의 중단(中断)이다. 생각하지 않음은 가장 조용한 공모(共謀)가 된다. 혈연으로 들어가면 관계는 더욱 복잡해진다. 부모와 자식관계는 선택이 아니라 구조이며 양육은 의무다. 이는 사랑 이전에 작동하는 비대칭적(非對稱的)인 책임의 질서다. 그러나 형제(兄弟)로 내려오는 순간 관계는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형제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비교(比較)의 대상이 되고, 사랑은 자연스럽게 주어지기보다 경쟁(競爭)위에 요청된다. 여기에 돈이나 권력이 개입되는 순간 형제는 빠르게 타인이 된다. 재산분배, 부양의 부담, 상속과 자원의 문제는 감정을 즉시 계산으로 전환시킨다. 어릴 적 기억과 정서는 계약 앞에 힘을 잃고 혈연은 도덕이 아니라 명분으로 호출된다. ‘피를 나눈 사이’라는 말은 신뢰의 근거가 아니라 요구를 정당화하는 언어로 작동한다. 니체(Nietzsche)의 시선으로 보면, 이 지점에서 도덕은 본능을 가리는 가면(假面)이 된다. 형제우애(兄弟友愛)는 자연이 아니라 이상이며, 현실의 묘사가 아니라 현실을 억제 하기 위한 요청이다. 그래서 그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에 강조된 것이 아니라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윤리로 선언되었다. 유교가 형제우애를 덕목으로 내세운 이유 역시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는 믿음이 아니라 그렇지 않다는 전제 위에 놓여 있다. 역사는 이를 반복적으로 증명해 왔다. 권력이나 자원이 개입되는 순간, 형제는 가장 먼저 경쟁자가 되었고 희소성이 커질수록 형제우애는 가장 먼저 시험대에 올랐다. 형제는 천륜이라기보다 조건부 협력관계(條件附 協力關係)에 가깝다. 그 조건을 외면한 채 사랑만을 요구할 때, 관계는 잔인한 방식으로 붕괴된다. 그래서 관계는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재배치의 대상이 된다. 연(緣)은 존중의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판단을 면제하는 권리는 아니다. 혈연• 학연•지연은 신뢰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상식이나 법 윤리를 넘어서는 통행증이 될 수는 없다. 관계의 이름이 판단을 대신하는 순간, 사회는 빠르게 사적 질서로 후퇴한다. 관계문제는 선악이 아니라 구조다. 어디까지가 의무(義務)이고 어디서부터가 선택(選擇)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 사랑은 빚이 되고, 도움은 청구서가 된다. 관계를 정립한다는 것은 끊어내는 일이 아니라 판단의 자리를 다시 개인에게 돌려놓는 일이다. 연(緣)이 그 위에 놓일 때 비로소 존중(尊重)이 된다.


2026 1月의 끝에서,

獨樂齋에서 幽人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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