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라는 이름의 힘~

모성애의 책임과 윤리

by diogenes

보호라는 이름의 힘~

- 모성애(母性愛)와 책임의 윤리 -

보호(保護)는 언제나 선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아이를 향한 보호는 좀처럼 질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본능(本能)이라 이해하며 때로는 숭고한 미덕(美德)으로까지 끌어올린다. 그러나 모든 보호가 언제나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보호가 상대를 세계로 이끌기보다 품 안에 머물게 할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힘이 된다. 이 글은 모성애를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다만 보호라는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행사되어 온 어떤 힘을 책임(責任)의 언어로 다시 묻고자 함이다. 스피노자에게 사랑은 도덕적 명령이 아니라 정동(情動)이다. 사랑이란 나의 존재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에 대한 기쁨이며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다. 모성애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종족의 유지를 위해 형성된 가장 강력한 본능 중의 하나이며 이성 이전의 충동이다. 무조건적(無條件的)이라는 말은 순수하다는 뜻이 아니라 판단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에 가깝다. 문제는 이 본능이 곧바로 도덕의 언어로 번역될 때 발생한다. 본능은 설명의 대상이지만 미덕으로 오해되는 순간 질문에서 면제된다. 모성애가 특히 비이성적으로 발동하는 순간은 아이가 아직 세계로 나가기에는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이다. 이때 보호는 사랑의 표현이라기보다 불안(不安)을 관리하기 위한 반응이 된다. 아이를 향한 염려는 점차 아이의 세계를 대신 판단하려는 의지로 옮겨간다. 보호는 준비가 아니라 지연의 형태를 띠고 사랑은 점점 개입(介入)으로 변한다. ‘위함‘이란 말속에서 아이가 스스로 판단할 기회는 조금씩 미뤄진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를 ’세계로 내보내는 책임‘을 말했지만 현실의 모성애는 대개 그 지점에서 멈춘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을 결국 사회로 보낸다. 그러나 사회로 나가는 것과 판단의 실패 가능성까지 함께 보내는 일은 다르다. 아이가 겪을 수 있는 위험과 좌절을 부모가 대신 감당하려 할 때 보호는 책임이 아니라 개입이 된다. 세계를 믿지 못하는 불안은 사랑의 이름으로 오래 머문다. 본능은 인간에게 필수적이다. 그러나 본능이 질문에서 면제되는 순간 그것은 윤리로 위협한다. 모성애를 다시 묻는다는 것은 모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을 본능에 가두지 않고 책임의 영역으로 옮기려는 시도다. 보호가 머무르게 하는 힘이 아니라 세계로 보내는 용기가 될 때 모성애는 비로소 인간(人間)의 언어를 얻는다.


2026 1月 끝날, 곧 설이 온다~

獨樂齋에서 幽人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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