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자유에 대한 한 관찰
시간(時間)이라는 구조~
- 존재와 자유에 대한 한 관찰 -
근대사회에서 시간은 더 이상 자연적 흐름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그것은 측정이 되고 분할되며, 인간의 행위와 삶을 조직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은 존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를 관리하고 조율하는 구조로 전환된다. 미셸 푸코는 근대의 학교, 병원, 군대, 공장과 같은 제도들이 공간만큼이나 시간을 세밀하게 분할함으로써 개인을 훈육하고 통제해 왔음을 지적한다. 그에게 시간표는 단순한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와 일상의 리듬을 길들이는 권력(權力)의 기술(技術)이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움직이고, 멈추는 행위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구조에 대한 순응의 결과에 가깝다. 이러한 시간의 구조는 특정 제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E.P톰슨은 산업자본주의 형성과 함께 인간이 일을 파는 존재가 아니라, 시간을 파는 존재로 재편되었다고 분석한다. 그 결과 시간은 추상적 가치가 되었고 ‘쓸모 있는 시간’ 과 ’낭비되는 시간‘ 이라는 구분이 인간의 삶 전반을 관통하게 되었다. 이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시간은 휴식이 아니라 불안의 원인이 된다. 노동이 멈춘 순간에도 시간은 여전히 흘러야 하며, 채워지지 않는 시간은 결핍으로 인식된다. 이 감각은 직업과 역할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하나의 사회적 기준 안에서 동일하게 작동한다. 학생에게는 학생의 시간이, 노동자에게는 노동의 시간이, 은퇴자에게 조차 비어 있어서는 안 되는 시간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개인이 제도적 역할에서 벗어난 이후에도 시간은 여전히 존재를 붙잡는다. 출근할 필요가 없어도, 성과를 요구받지 않아도, 시간은 스스로 채워야 할 과제가 된다. 여기에서 시간은 자연(自然)도 개인의 선택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공유한 하나의 구조이며, 존재가 벗어나기 가장 어려운 굴레 중 하나로 남는다. 이러한 시간 구조가 자연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 장치라면, 존재가 경험하는 불안과 조급함 역시 개인의 성향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문제는 시간을 제거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의 시간으로 통일된 사회 안에서 그 구조의 성격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각자가 처한 현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태도야 말로 존재를 가장 깊이 종속(從屬)시킨다. 시간을 절대적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이 관리나 조율을 위해 형성된 구조임을 인식할 때, 존재는 비로소 현재의 요구로부터 거리(距離)를 확보한다. 이 거리는 회피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위치를 자각하는 조건이다. 이 지점에서 자유는 인식의 문제로 바뀐다. 시간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 밖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작동하는 방식을 아는 상태로 자신의 삶을 다시 배치하는 일이다. 그러한 인식 위에서만 존재는 현재에 소모(消耗)되지 않고, 자신에게 허락된 삶의 리듬을 회복할 수 있다.
2026 2月初, 새로운 세상을 보며
獨樂齋에서 幽人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