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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컨 Feb 27. 2024

엔딩 크레디트가 없는 경영 컨설팅

파묘 관람 소감

# 파묘 관람 소감


지난 주말에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요즘 한창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파묘였습니다. 일전에 재미있게 본 <사바하>와 <검은 사제들>을 만든 감독의 작품이라서 관심이 갔고, <카지노>에서 발군의 연기를 보여준 최민식이 출연하기에 믿음이 갔으며, 결정적으로 와이프가 선택한 영화라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갔습니다. 혹시나 재미가 없더라도 꾸지람 들을 염려는 없으니까요. 


영화를 본 소감은 절반의 성공과 실패라고 하겠습니다. 우려와 달리 잔인한 장면이 많지 않은 점은 다행이었습니다. 피와 살이 튀기는 거북한 장면이 섞여 있지만 슬래셔 무비급은 아닙니다. 기대와 달리 무섭지 않은 점은 실망이었습니다. 중반부까지 스멀스멀 죄어오던 공포는 후반부에 들어서며 힘을 잃습니다. 공포를 기대했던 관객에게 교훈을 줍니다. 


전체 2시간여의 상영 시간 중 전반부 1시간은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후반부 1시간은 그럭저럭 참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기 전 몇 분 간 보여주는 등장 인물들의 후일담은 꽤나 인상 깊었습니다. 교훈적인 내용에 실망했던 저의 호기심과 공포심을 다시 자극하는 흥미로운 장면이기에 무슨 의미인지 곱씹기 위해서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덕분에 마블 영화가 아닌데도 엔딩 크레디트를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 엔딩 크레디트의 등장


파묘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등장합니다. 주조연급 배우뿐만 아니라 단역으로 등장한 배우의 이름도 빠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파묘를 부탁한 미국에 살고 있는 부잣집에 방문하는 장면에서 1~2초 정도 등장했던 외국인 가정부의 이름도 엔딩 크레디트에 등장합니다. 배우의 이름뿐만 아니라 촬영, 조명, 의상, 로케이션 등 영화 제작에 참여한 모든 이의 이름이 공평하게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제가 당사자라면 참으로 뿌듯할 것 같습니다.


엔딩 크레디트가 언제부터 등장했는지 새삼 궁금해졌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등장한 지 몇십 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초창기 영화는 감독이나 주연급 배우만 이름을 올렸다고 합니다. 엑스트라나 보조 스태프의 이름은 영화에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영화에 참여한 모든 배우와 스태프의 이름을 엔딩 크레디트에 처음 넣은 이는 흥미롭게도 조지 루카스라고 합니다. <스타워즈>를 찍은 바로 그 감독입니다.  


<스타워즈>를 찍으며 세계적인 감독에 오르기 전의 무명 시절에 조지 루카스는 <청춘 낙서>라는 영화를 찍었습니다. 돈이 없었기에 대부분의 배우와 스태프가 거의 무료로 영화 제작에 참여해 주었고, 이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 엔딩 크레디트에 모든 이의 이름을 기재했으니, 이것이 최초의 엔딩 크레디트라고 합니다. 엔딩 크레디트의 기원이 된 <청춘 낙서>가 1973년에 개봉을 했으니 130년에 달하는 영화 역사에서 엔딩 크레디트가 자리 잡은 기간은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 엔딩 크레디트가 없는 경영 컨설팅


아쉽게도 경영 컨설팅에는 엔딩 크레디트가 없습니다. 보고서에 컨설턴트의 이름이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프로젝트를 팔기 위한 제안서와 착수 계획서의 투입 인력 파트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 전부일뿐, 실제 프로젝트 산출물에는 참여한 컨설턴트의 이름을 기재하지 않습니다. 간혹 인터뷰 담당자로 한 줄 들어가기도 합니다만 프로젝트에 누가 참여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 어떤 산출물을 작성했는지를 기재하지는 않습니다. 수많은 보고서를 써왔지만 항상 유령 작가 신세였습니다. 저의 이름을 남길 수 있다니 뿌듯할 것 같습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처럼 컨설팅 산출물에 컨설턴트의 실명을 기재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마도 거의 모든 컨설턴트가 더욱 열심히 일할 것 같습니다. 본인의 이름을 걸고 작성하는 내용인데 대충 휘갈겼다가 박제라도 되면 평생 망신이니까요. 그만큼 더욱 많은 스트레스를 받겠지요. 유리 멘털인 저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압박일 것 같습니다. 보고서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을 우려도 있습니다. 구조조정으로 실직한 이들이 보고서의 한 귀퉁이에서 저의 이름을 발견한다는 상상을 해보니 아찔하네요.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구조조정 프로젝트는 해본 적이 없습니다.) 


파묘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서 잠깐 부러워했지만 안될 일인 것 같습니다. 유령 작가의 삶이 속편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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