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큐레이션 및 알고리즘이 만든 함정?...>
어느순간 부터 내가 좋아서 본 건지, 계속 보여서 좋아진 건지 모르겠는 부분이 생기기 시작한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인스타 피드를 넘기면 항상 보게 되는 ‘그런’ 이미지들이 있다. 창이 많은 무채색 건물, 선명한 하늘, 검정색 니트나 어두운 립을 바른 사람, 정갈하게 정리된 책상 위에 우유빛 커피 한 잔...
나는 좋아한다고 말한 적 없는데, 어느 순간 이게 ‘나의 취향’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즘 이렇게 ‘내가 고른 것’이라 착각하는 것들로 하루를 살아가게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넷플릭스가 보여준 콘텐츠일 수도 있고, 유튜브가 추천해준 영상, 쇼핑 앱에서 뜨는 옷 스타일, 혹은 새로 생긴 카페의 분위기까지... 좋아함과 노출의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 진짜 내가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익숙해진 것뿐일까?...>
이것은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데이터에서도 이런 부분들은 너무나 흔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1. 미국의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 Pandora는 놀라운 데이터를 발견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이 아니라, “자주 들려준 음악 = 결국 좋아지게 된 음악”인 경우가 많았다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보고서에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용자의 취향을 예측한 게 아니라, 사용자의 취향을 조성했다.” 라는 내용이죠
2. 넷플릭스는 사용자 성향에 맞춰 썸네일을 바꿔 보여주는 알고리즘을 쓰고 있습니다.
같은 영화라도, 로맨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키스신을 보여주고,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어두운 장면을 보여주곤 합니다.
당연히 클릭률은 높아졌습니다. 콘텐츠의 실제 내용보다 썸네일이 클릭률을 결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러브스토리’라고 믿고 재생했지만, 정작 내용은 사이코 스릴러였던 것 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끝까지 보게 되는 경우가 더욱 많아졌습니다. ‘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보고 나니 괜찮은’ 이 모호한 감정은, 결국 다시 추천 알고리즘을 정교하게 만들어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죠. “내가 이걸 정말 보고 싶었던 건가?”
3. TikTok –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TikTok은 전통적인 취향 기반 추천이 아닌, 반사적 행동 기반 알고리즘을 통해 콘텐츠를 선별합니다.
즉, 사용자가 좋아요를 눌렀는지가 아니라, 몇 초 머물렀는지, 스크롤 속도가 느려졌는지, 영상을 반복 재생했는지 같은 미세한 ‘행동 데이터’가 피드 구성을 좌우합니다.
이 알고리즘의 무서운 점은, 사용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묻지 않고, 단지 무의식적으로 멈춘 시간을 근거로 콘텐츠를 계속 던진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용자들이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보게 되긴 하는데, 다 보고 나면 뭔가 허무해요." “좋아해서 본 게 아니라, 그냥 계속 보여서 본 것 같아요.” 라는 반응들이 나타나곤 합니다.
실제로 틱톡 중독은 취향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든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뭘 좋아하더라?“라는 자아 회의가, 15초짜리 짧은 영상 속에서 점점 커지고 있는 것입니다.
4. Steam – “추천보다 랜덤이 더 설렌다”
세계 최대의 게임 플랫폼 Steam은 오랜 시간 개인화 추천 알고리즘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유저의 플레이 기록, 장르 선호, 친구들의 활동 내역을 반영해 “너라면 이 게임을 좋아할 거야”라는 추천을 매일 제공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유저의 관심과 전환율이 높았던 건 추천이 아닌 ‘랜덤 할인’ 이벤트였습니다.
Steam은 시즌별로 ‘랜덤 딜’ 이벤트를 진행하며, 유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틀을 특정 시간대에만 할인하는 방식으로 운영했습니다. 이 이벤트에서 클릭률은 맞춤 추천 대비 2배 이상 높았고, 구매 전환율도 상승했습니다.
유저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추천은 너무 비슷한 게임만 보여줘서 질려요." , “랜덤 할인 덕분에 평소 안 하던 게임을 해보게 됐어요.” 라는 반응들을 보이곤 합니다.
즉, 예측 가능한 정확함은 흥미를 떨어뜨리고, 우연의 요소는 오히려 탐험의 재미를 선사하게 된 것입니다.
5. Goodreads – “누가 읽었느냐가 더 중요해”
책 추천 플랫폼 Goodreads는 아마존이 인수한 뒤로 AI 기반 추천 시스템을 강화해왔습니다. 유저의 평점, 선호 장르, 과거 독서 기록을 바탕으로 자동화된 도서 추천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Goodreads 사용자들이 실제로 신뢰하는 건 알고리즘이 아닌 ‘사람’, 특히 ‘친구’의 책장이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Goodreads 유저는 책의 장르나 평점보다 “내 친구가 이 책을 왜 골랐는지”, “나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이 읽고 어떻게 느꼈는지” 를 더 중시하며 독서 선택을 합니다.
알고리즘은 “비슷한 책”을 보여주지만, 친구는 “내가 몰랐던 책”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매우 큽니다. 많은 유저들이 이렇게 리뷰했습니다. “추천 책 리스트보다 친구가 남긴 한 줄 서평이 더 와닿았어요.”, “그 친구가 읽었기에, 나도 읽고 싶어졌죠.” 반응들을 보이곤 합니다.
이처럼 ‘정확함’ 보다 ‘연결’과 ‘신뢰’가 더 강력한 큐레이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 추천 보다는 랜덤함으로 이동되는 트렌드?...>
이건 단지 콘텐츠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커머스, 패션, 음식, 심지어 여행지까지 우리가 좋아한다고 믿는 많은 것들이 실은 알고리즘이 쥐여준 ‘맞춤형 취향’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실제로 독일 베를린 기반의 커머스 스타트업 Modomoto는 개인의 취향을 AI로 분석해 스타일리스트가 옷을 큐레이션해주는 서비스였는데, 몇 년간 성장하다가 2020년 문을 닫았습니다.
❌ 사용자 리뷰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매번 비슷한 옷이 와서 지겨웠다”였습니다. 한 마디로, ‘정확한 추천’이 결국은 ‘예상 가능한 지루함’이 된 셈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 그리고 흥미롭게도, 요즘 유럽과 일본에서 주목받는 커머스 앱들은 다시 ‘랜덤박스’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확한 취향 분석보다, 예상 못한 무작위성과 놀람을 주는 쪽으로 트렌드가 이동 중인셈 입니다.
⭕️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Digger’라는 신생 이커머스 앱은 AI 추천을 최소화하고, 매일 10개씩 전혀 다른 스타일의 제품을 무작위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용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는 합니다. “오늘은 누구의 취향이 되고 싶나요?”
❗️놀랍게도 이 앱의 평균 체류 시간은 개인화 기반 커머스 앱보다 1.7배 길었습니다.
< 나도 나를 모르는데?...>
위에 랜덤사례는 “내 취향”이 아닌 “모르는 취향”을 탐험하는 데 더 오래 머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고른 것 같지만, 실은 알고리즘이 정해준 인생이 아닐까. 추천에 익숙해질수록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게 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 입니다.
좋아해서 본 건지, 보여서 좋아진 건지. 그 질문에 확신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가끔 의도적인 무작위성이 필요하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닌다. 내 취향이 어딘가에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변하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는 걸 믿기 위해서 말이죠
✓ 마치며
가끔은 일부러 낯선 브랜드를 검색해봅니다. 팔로우 하지 않은 계정을 본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플레이리스트를 랜덤 재생하기도 해보고요. 그렇게라도 ‘진짜 내 취향’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선택하고 있지만, 어쩌면 가장 큰 선택은 '정확한 것’보다 ‘낯선 것’을 택하는 용기인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