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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코코 Jun 01. 2024

존경하는 '해럴드 블룸'에 대하여 (3)

'의식의 흐름' 기법을 선호하는 해럴드 블룸의 평론에 관하여

헤밍웨이는 글은 쉽고 짧게 쓰는 것으로 유명하고, 또 그렇게 써야만 한다고 가르치기도 하고 마치 이런 방식으로 쓰는 방법이 글을 잘 쓰는 현명한 길이라고 그는 누누이 강조하였다. 그리고 나조차도 헤밍웨이가 말한 이런 방법이 올바르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의 선생님들도 이런 방식으로 글을 써야만 한다고 말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헤밍웨이가 첫 직업으로 가진 기자라는 직분에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사를 써야만 기사의 내용이 독자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기에 기자 직업에서는 이렇게 쓰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간단하고 쉽게 글을 쓰는 방법은 신문 기자에게만 해당하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내가 해럴드 블룸을 만나면서 깨닫기 시작했다.

해럴드 블룸은 문학은 어렵게 써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평론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헤밍웨이를 2류 작가로 사정없이 강등시켰다. 그의 저서에서 글을 어렵게 쓰라고 말한 내용은 전혀 찾을 수 없었지만, 내가 해럴드 블룸에게 푹 빠져 있던 1개월 동안 나는 글을 쉽게 쓰고 간결하게 쓰는 방법이 좋은 글을 쓰는 방식이 아니라는 결론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내리게 되었다. 작가가 철학을 논하고 사상을 펼치고 고뇌를 고백할 때에는, 글이 쉽고 간단하게 도저히 써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심지어 의식의 흐름이라는 전혀 뜻밖의 기법도 나타났으니 기자처럼 단문 흐름으로 글을 쓰는 게 절대로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으로 예전에 이미 밝혀졌다. 실제로 헤밍웨이의 책에서는 철학도 사상도 거의 없었다. 약간의 고민한 흔적은 있을지라도 고뇌는 없었다. 헤밍웨이는 단순한 성격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숱한 밤을 고뇌로 힘들어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물론 정신질환 때문이었겠지만 그는 고민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한 작가였고, 허구한 날 술과 여자와 담배와 낚시에 의지하고 즐기면서 제 멋대로 살았다. 이런 습관적인 행태 속에서 철학을 논하고 사상으로 밤을 지새우고 고뇌로 머리가 터지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독한 술을 퍼먹고 그 자리에서 잠에 곯아떨어지는 단순한 유형의 사람이었다. 해럴드 블룸은 이런 작가들을 경멸하였다. 그가 스티븐 킹과 조앤 K. 롤링을 극단적으로 싫어한 이유는 이들이 쓴 글은 고뇌의 흔적이 안 보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글이란 피를 토하듯이 써 내려간 철학의 고백이 고뇌의 과정을 거쳐서 괴로움을 쏟아내야만 한다. 그가 이런 내용으로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한 적은 없지만, 해럴드 블룸을 연구하던 내가 발견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이런 방식의 글을 원한 것 같다. 나도 그의 이런 견해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내가 그를 진심을 다하여 존경하고 흠모하게 된 이유도 글을 대하는 그의 철학에 깊이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 스티븐 킹, 조앤 K.  롤링 등은 평생 영지주의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가들이다.


영지주의자들의 대표 격인 소크라테스는 철학과 정의를 논하다가 결국 위정자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독약을 마셔야만 했고, 끝까지 자기의 철학과 소신을 지키다가 생의 마지막에서 플라톤은 노예로 전락하는 슬픔으로 처절하게 끝이 났다. 이들의 험난한 고뇌를 위의 평범한 작가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해럴드 블룸의 확고한 신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해럴드 블룸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영지주의자들의 삶은 종교와 정치에 맞서서 진정으로 투쟁하였고 죽음 앞에서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겪었던 한 맺힌 시간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고고한 철학적 신념을 지켜내기 위하여 흔들림 없었던 용기를 확인하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나도 영지주의자들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위대한 해럴드 블룸을 진정으로 존경하게 되었으며, 대학 때에 읽었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요즘  다시 읽다가 중간에 더 읽기가 싫어져서 책을 던져 버렸고, 스티븐 킹의 책은 깃털처럼 가벼워서 2시간 만에 대충 읽어도 충분하였다. 그런데 이런 노인과 바다를 기초로 노벨 문학상을 주었으니, 이 상의 가치에 관하여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더구나 헤르만 헤세 같은 종교에 깊숙이 빠져버린 미친 작가에게도 노벨 문학상을 준 이상한 결정은 해럴드 블룸의 의견처럼 노벨 문학상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노벨 문학상의 심사에서 벌어진 한심한 행태는 참으로 역겨움의 연속이었다. 이럼에도 상당 부분의 작가들이 노벨 문학상에 목을 매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실망을 넘어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문학의 영역에서 종교의 문제에 무지했던 작가들에 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어 보려고 한다.


이처럼 해럴드 블룸은 사실상 어렵고 난해하게 쓴 글을 비교적 선호하는 편에 속한다. 나는 이런 그의 성향이 옳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에는 반론을 제기하면서 그의 논리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의견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그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모태로 하는 작품들에 관하여 매우 긍정적인 평론을 하는 성향에 관하여 나는 처음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그에 관하여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가 모더니즘 작가들을 철학가들의 반열 위에 놓고 해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이런 성향으로 그는 전 세계 100인의 문학 작품에서 헤밍웨이를 넣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도 출판사의 거절하기 힘든 부탁에 의해서 헤밍웨이를 100인에 포함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는 100인의 문학가를 선정한 이유도 출판사의 요구 때문에 부득이 추진하였다고 여러 번 되뇌곤 했다. 한 가지 예로, 그는 저서에서 헤밍웨이에 대하여 2류 소설가라고 냉정하게 평론하였는데, 2류 소설가를 전 세계 최고의 문학인 100인에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았던 행동이다. 이런 냉정성향의 그의 견해로는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4류~5류 작가 정도에 포함시켰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작가들을 평가하는 그의 기준으로 본다면, 글을 좀 어렵게 쓰는 작가를 더 인정한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분명하다. 그중에서 유독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글을 쓴 모더니즘 작가들을 상당히 선호하고, 대단하다고 평론을 하고 있다. 그의 이런 평가는 여러 평론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다. 헨리 제임스, 제임스 조이스, 마르셀 프루스트, 허먼 멜빌,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이 바로 대표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작가들이다. 물론 '이상' 작가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중에서 제임스 조이스, 허먼 멜빌, 윌리엄 포크너 등은 특히 해럴드 블룸이 매우 사랑하는 최고의 작가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 3명의 작가들에 관하여 더 논하려고 한다.


이들 중에서 해럴드 블룸은 허먼 멜빌을 미국 현대 작가의 최고봉으로 선정하였다. 나는 지난 (1) 편에서도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만약 미국 최고의 작가라면 영어권 독자들과 미국의 대중들이 누구나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써야만 한다. 그런데 그의 대표작인 모비딕은 영문학을 전공한 국내 명문 대학교의 교수조차도 읽기 어려운 작품이라고 토로했다. 얼마 전에 이 책을 국내 한 정치인이  예비 고등학생에게 선물하여 잠시 언론에서 회자된 적이 있었다. 위의 영문과 교수는 곧바로 신문 칼럼에 기고를 통해서, 모비딕은 전문가인 그 교수조차도 읽기 매우 어려운 책이라고 고백하였다. 즉 고등학생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선물할 책은 아니라는 의견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이 영문과 교수의 의견이 옳다는 사실은, 이 책을 직접 읽어본 사람이라면 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성인들도 너무 읽기 힘든 책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대학 때에 모비딕을 읽다가 책이 너무 난해하여 그냥 책장만 넘기면서 적당히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나는 약 6개월 전에 이 책을 다시 읽었지만 여전히 너무 읽기가 괴로웠다. 이번에는 마음을 다 잡고 집중하면서 반복하여 2번을 읽었지만 여전히 힘들게 읽어 나가야만 했다. 나는 비교적 평범한 독자에 속하는데, 이런 내가 읽기 힘들면 그 책은 정말 좋은 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영문과 교수처럼 전문가도 읽기 힘든 책이라고 고백할 정도라면, 그런 책을 미국 현대 소설의 최고라고 선정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난해하게 쓴 '의식의 흐름' 기법의 모비딕을 해럴드 블룸은 미국 현대 소설의 최고라는 찬사를 보냈다. 이런 그의 판단이 과연 옳은 결정인지 상당히 의문이 든다. 모비딕이 가진 문제는 크게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오직 작가만이 이해할 수 있는 어려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고(어떤 이들은 이 기법을 아무 말 대잔치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종교에 끌려다니고 철저히 속박당했으며, 일반인들이 굳이 알 필요가 없는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가득 찬 내용들이 넘쳐나도록 나열되어 있다. 특히 고래와 포경 산업에 관한 난해한 전문적인 지식들을 그토록 자세하게 책의 상당 부분에 채워나간 방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바보 같은 행위였다. 이것은 고뇌가 부족한, 실력 없고 게으른 작가들이 쉽게 끄적일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비딕의 주인공처럼 같이 미칠 것만 같았다. 즉 허먼 멜빌은 미국의 문학가들이 자만심에 가득 차서 흥분하여 만들어낸 작은 영웅일 뿐이라고 과감하게 정의 내리고 싶다. 위의 영문과 교수는 모비딕의 어렵고 쓸모없는 단락들은  읽지 말고 그냥 넘겨버려야 한다고 간단히 조언했는데, 이런 책을 훌륭한 책이라고 강조하는 해럴드 블룸과 미국 작가들에 대하여 객관성이 결여된 의식으로 모비딕을 평가하고 다고 결론 내렸다.


나는 제임스 조이스를 정말 좋아한다. 그런데 해럴드 블룸은 나보다 몇 배는 더 제임스 조이스를 사랑했다. 그의 저서 '율리시스'는 정말 의식의 흐름 기법의 최고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칭찬하는 것만이 아니고 사실상 제임스 조이스에 대한 실망과 의문도 동시에 제기하는 것이다. 율리시스가 얼마나 난해한지, 미국의 현존하는 100명의 대단한 작가들은, 이 작품은 단지 미국과 영국 대학교의 영문학과에서 연구만을 위하여 일부러 쓰인 소설이라고 비아냥 대기도 한다. 이렇게 100대 작가들 중에서 상당 수가 율리시스를 문제가 있는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이들 중에서 일부는 헤밍웨이를 실력이 없는 작가라고 직접 거론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율리시스를 폄하하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관해서는 이들 100대 작가들의 견해는 매우 긍정적이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이런 작가들의 의견에 대하여 나의 반박은, 제임스 조이스는 나라를 잃어버려서 유럽의 여러 나라로 떠돌던 조국도 없었던 아일랜드 작가이고, 허먼 멜빌은 대단한 미국 작가이기에 미국 후배 작가들이 허먼 멜빌에 관하여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에 비하여 제임스 조이스는 상대적으로 철저히 무시당한 경향일 수 있다고 나는 주관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다. 실제로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를 출판하고 미국 등에서는 극도로 배척되었지만 유럽에서는 점점 사랑받기 시작한 외롭던 작가였다. 물론 모비딕보다 율리시스가 읽기에 너무 힘들고 괴로울 정도이며, 소설을 연구하는 영어권의 대학 영문과에서도 율리시스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당연히 '의식의 흐름' 기법인 율리시스처럼 극단적으로 어렵게 쓰인 글은 절대로 훌륭한 책이라고 정의할 수 없기에, 나도 역시 율리시스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똑같이 모비딕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해럴드 블룸은 모비딕은 물론 율리시스도 대단한 작품으로 인정했는데, 나는 이 결정에 관하여 완곡하게 반대하고 싶다. 제임스 조이스와 허먼 멜빌에 관하여 굳이 더 비교하자면 이들이 쓴 다른 책들을 비교하면 분명히 결론을 내일 수 있다.


제임스 조이스의 다른 저서 '더블린 사람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등을 읽는다면, 그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지 않고도 정말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 수 있다. 나는 율리시스에 실망한 독자라면 위의 작품들을 꼭 읽어보기를 강권하고 싶다. 내가 경험한 제임스 조이스는 진정으로 천재적인 작가이다. 그리고 해럴드 블룸이 제임스 조이스를 너무 사랑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는 해럴드 블룸에게 영지주의에 관한 개념을 더 확고하게 심어준 진정한 영지주의자였고, 그의 글 속에서 셰익스피어를 해럴드 블룸에게 적극 추천한 작가였다. 즉 해럴드 블룸은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여러 면에서 불꽃같은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허먼 멜빌은 단지 미국 작가라는 이유로, 미국 후배들의 적극적인 후광에 힘입어 지금 우리들 대화에 긍정적으로 오르내리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다음 (4) 편에서 종교의 문제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더 깊게 거론할 예정이지만, 허먼 멜빌은 도스토예프스키와 헤르만 헤세 등과 함께 종교에 깊이 빠진 상태로 허우적거리는 작가들이다. 물론 이들의 사상은 종교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오히려 종교적 삶에 기대서 살았던 답답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종교에 관한 설파는 종교인에게 의지해도 충분하고 아직 깨어있지 못했던 중세에나 있어야 될 일들이었다. 이들이 작품에서 종교적 삶을 살아야만 행복하다고 강조하는 등의 미개한 개념판단은 답답하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오른다. 더구나 허먼 멜빌은 다른 저서에서도 여전히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허먼 멜빌을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 같은 실력 있는 작가라고 인정하기에는 그는 턱 없이 부족하다. 미국인이 모비딕에 열광하는 사실에 대하여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허먼 멜빌을 제임스 조이스와 비교하거나 윌리엄 포크너와 견주는 행동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다시 강조하고 싶다.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는 그의 작품 속에서 종교를 자연스럽고 슬기롭게 다스렸던 진정한 천재였던 것만 보아도, 허먼 멜빌은 이들을 따라잡기에는 너무 열악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이런 점에서 온통 종교의 정서를 깊숙하게 나열한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상당히 문제 있는 책으로 결론 내렸다. 허먼 멜빌은 모비딕에서 지독하게 종교에 순응하는 자세를 취한다. 비록 허먼 멜빌이 모비딕을 쓴 내용 속에서, 목숨을 건 처절한 전쟁과도 같은 험난한 상황을 전개하고 공포를 넘어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나약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종교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토로해야만 했던 것은 부득이 이해할 수 있지만, 작가가 종교의 힘에 기대는 것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의지하며 종교의 삶강조하면서 소설을 써내려 간 모비딕은 이 소설의 가치를 크게 훼손시켰다. 그나마 도스토예프스키, 헤르만 헤세 등과 비교한다면 허먼 멜빌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모비딕에서 단지 종교에 억눌렸다기보다는, 글의 도구로 사용하려고 애쓴 흔적도 엿보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비록 영지주의자는 될지언정, 종교와 정치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가 훌륭한 작가라고 설명하기에는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진다. 문학과 철학에서 종교적인 그늘과 속박은 매우 위험하고 동시에 이는 중요한 관점이기에 앞으로 더 깊이 다루려고 한다. 물론 정치적인 그늘은 더 위험한 행태임은 말하나위도 없다.


'의식의 흐름' 기법, 모더니즘 작가를 강력하게 인정하는 해럴드 블룸에게 나의 의견을 조심스럽게 전하려는 이유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하여 무조건 어렵게만 책을 써버리면서 독자들이 이해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나 몰라라 하고 무책임했던 일부 작가들의 행태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정말 지독하게 읽기 어려운 책이다. 이 책을 읽다가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지고 화를 억눌러야만 진도가 겨우 나간다. 책을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친다거나 읽기 힘든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하는 면에서는 율리시스는 모비딕을 훨씬 뛰어넘는다. 물론 율리시스는 해럴드 블룸도 격찬하는 위대한 작품이며, 모비딕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말 복잡하고 대단한 작품이다. 이런 이유로 전 세계 대학의 영문학과에서 이 작품을 앞다투어 연구하고 있다. 내 판단으로는 율리시스가 분명히 훌륭한 작품인 것만큼 틀림없는데, 나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하기에 좀 벅찬 작품이다. 나는 율리시스를 생각할 때마다, 제임스 조이스가 언제나 안타깝다는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런데 모비딕의 허먼 멜빌은 미국 작가이기에 그를 보호하려는 후배 영어권 작가들이 강물이 범람하듯이 흘러넘친다. 이렇게 율리시스는 여러 작가들이 혀를 내두르는 반면에 모비딕은 대부분 인정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모습 상황은 이율배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비딕도 율리시스와 같은 '의식의 흐름' 기법의 문제를 지닌 매우 난해하게 쓴 책이기에 나는 좀처럼 해럴드 블룸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미국 현대 문학의 최고에는 허먼 멜빌보다는 리엄 포크너로 결정하라고 해럴드 블룸에게 충고하는 것이다. 여기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쓴 대표적인 책이지만 이 책은 분량이 많은 반면에 읽기가 수월한 편이다. 그래서 어려움에서 율리시스 정도의 책은 지구상에 겨룰 수 있는 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 문학계에서 해럴드 블룸이 매우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 이처럼 잠시 나왔다가 바로 사라진 상황은, 이 기법의 한계 때문에 절대로 오래도록 문학계에서 인정받을 수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의식의 흐름은 원래 어렵게 쓰려고 출발한 기법은 절대로 아니다. 모더니즘이 나오기 전의 과거에는, 문학은 인간과 사회가 맺는 관계를 집중적으로 탐색했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미진한 것들이 남아 있었는데, 이를 타개하고자 의식의 흐름이 시작된 것이다. 즉 그전까지 작가는 외부에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면서 글을 써왔는데, 위에서 말한 무언가 미진한 부분이 항상 남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작가가 직접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인간이 느끼는 의식의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모더니즘의 출발이었다. 여기서 윌리엄 포크너는 저자의 목소리로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그 인물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는 방식을 취했다. 이것이 윌리엄 포크너의 방식과 그 전의 모더니즘 작가들의 방식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윌리엄 포크너의 의식의 흐름 기법은 쉬운 전개를 펼치는 노력으로, 다른 작가보다 훨씬 읽기 편하다는 강점도 있다. 이것은 윌리엄 포크너가 지닌 탁월한 글 실력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거론한 대로 제임스 조이스의 다른 저서들을 읽어보면, 그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버리고도(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 일부 나오기도 한다) 작품을 매우 평이하고 상당히 잘 써 내려가면서, 그의 철학과 고뇌를 잔잔하게 그려낸 실력 있는 작가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반면에 허먼 멜빌은 그의 다른 책에서도 읽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국의 후배 문학인들은 제임스 조이스보다 허먼 멜빌에게 더 찬사를 보낸다. 나의 견해는 당연히 제임스 조이스가 훨씬 더 뛰어난 작가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따라서 허먼 멜빌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인정하는 해럴드 블룸과 미국의 후배 작가들의 주장은 합리적인 의견이 절대로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어쩌면 애국심 의해서 허먼 멜빌을 더 이해하려는 것은 아닐까? 허먼 멜빌은 살아생전에는 마치 화가 고호처럼 그의 책은 거의 팔리지도 않았다. 그는 지독하게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죽은 다음 한참 지나고 나서야 모비딕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겨우 인정받기 시작한 매우 불운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것도 일반 독자들이 의해서 자연스럽게 인정한 상황이 아니라 다른 작가의 추천에 의해서 서서히 인식되기 시작한 작가다. 그가 발굴된 것은 매우 독특한 케이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미국인들과 해럴드 블룸은 유독 더 허먼 멜빌을 사랑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자부심으로 충만한 미국 독자들의 마인드에서, 자랑스러운 선배를 진정으로 존경하는 영어권 100인의 작가들 후배의 입장에서, 심오한 고뇌의 흐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해럴드 블룸의 지적 판단에서는 모비딕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문학적 성과라는 사실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신성한 고호 같은 허먼 멜빌은 미국인들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보물임에는 틀림없다.(물론 고호가 훨씬 더 신성하고 탁월한 예술가이다. 실은 허먼 멜빌을 고호와 비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모비딕을 대할 때면, 마치 나조차도 미국인이 된 심정으로 허먼 멜빌에 대하여 뜨거운 애정이 분출되기도 하는데, 하물며 미국인들의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솟구칠 기세로 모비딕을 찬양하고 싶을 것이다. 이토록 나도 모비딕의 열정과 진심을 잘 알고 있고 허먼 멜빌이 훌륭한 작가라는 사실을 나도 충분히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제임스 조이스나 윌리엄 포크너의 반열 위에 올려놓을 수 없다는 내 주장은 절대로 굽힐 수 없다. 또한 모비딕이 지닌 여러 가지 결함은 이 책의 의미와 가치를 많이 손상시키고 있다.


같은 모더니즘 작가이지만 윌리엄 포크너는 젊은 시절부터 일반 독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저서들은 위에서 거론한 다른 모더니즘 작가들의 책과는 다르게 읽어나가기가 비교적 수월하고 그의 철학은 곳곳에서 반짝이며 비추고 있다. 물론 나는 처음에 그의 '음향과 분노'를 읽으면서 처음으로 대하는 이상한 기법에 매우 당황하였다. "아니 이렇게 이상한 방법으로 쓴 소설도 있네?"라고 의문을 가지면서 계속 읽어야만 했다. 하지만 한 번 더 정독의 자세로 다시 읽으면서  내용의 깊이를 이해하고, 그가 대단한 작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해럴드 블룸이 좋아하는 '월의 빛'과 내가 정말 좋아하는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읽고 나서는 그가 톨스토이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는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내가 (1) 편에서도 이미 거론했고 해럴드 블룸도 인정했듯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실로 대단한 작품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윌리엄 포크너를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에 이 작가의 위대한 집념을 차분하게 더 다룰 예정이다. 전 세계에는 윌리엄 포크너를 존경하고 따르는 작가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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