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코코 May 12. 2024

존경하는 '해럴드 블룸'에 대하여(1)

해박한 지식과 논리로 문학에 관한 개념을 정립한 위대한 평론가

인류의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국가가 일부 지역을 오랜 기간에 거쳐서 통치하거나 장악하고 간섭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20세기 이후의 미국처럼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 이토록 깊숙이 영향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오늘날 미국은 비록 통치는 하지 않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지구의 대부분 지역에 여러 방면에서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렇듯 미국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 세계의 의식구조를 지배하며, 특히 문화에 관하여 마치 물이 스며들듯이 모든 것을 젖어들게 하면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의 대단한 힘은, 고대와 중세의 그리스 아테네 등 도시 국가들의 문화와 로마의 문화와 중국 문화가 그들 주변국가들에게만 전파된 상황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지구 거의 모든 지역과 영역에 뿌리내리고 있다. 인류의 문화에서 언제나 앞서나갔던 중세 유럽과 근대 유럽은, 정치와 군사적 힘에서도 20세기 이후부터는 미국으로 넘어가는 상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미국이 유럽을 제치고 문화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이런 상황은 단순히 미국 문화의 팬덤 현상이라고 설명하는 것 이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류의 역사에서 이집트와 그리스 아테네와 로마와 오스만 제국과 중국 스페인 영국 등의 국가들이 아무리 영향력이 대단했던들, 오늘날 미국에 비하면 그들의 영향력은 교통 발달의 한계와 언어와 인종의 벽으로 인하여 작은 지역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류가 자동차와 항공 등의 수단으로 교통망이 갈수록 확충되고 지역 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등 디지털의 세계로 발전하면서 이제는 인류가 마치 한 울타리에 안에 같이 사는 듯한 공동체적 환경으로 놓이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개발하고 선도한 미국의 영향력은 점점 더 세계의 모든 지역에 한층 넓고 깊게 퍼져 나가고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전 세계 속에서 미국의 문화는 거부할 수 없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장황하게 미국의 영향력을 설명하면서 인류의 역사까지 거론한 이유는, 오늘날 인류의 문학에서도 미국의 한 문학 평론가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그는 내가 얼마 전부터 문학의 시간에 빠져들면서 우연히 접하게 된 문학 평론가인데, 인류 문학의 전체를 관통하면서 한 줄기의 개념을 자신감 있게 정립하고 정리해 나간 '해럴드 블룸'이다. 지금 미국의 문화가 대단하듯이 그가 지금 세계 문학의 영역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내가 그를 만나게 된 계기는 4개월 전이다. 내가 앞으로 소설을 쓰겠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약 6개월 전에, 부족한 나의 문학 지식을 보충하겠다는 집념으로 밤낮으로 문학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어가다가 우연히 그가 제시하는 '독서에 관한 안내와 방향'을 접하면서 또한 그가 정립한 문학의 개념을 이해하면서 그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문학책을 체계적으로 읽어야겠다고 나는 결심하게 되었다. 내가 읽은 그가 쓴 몇 권의 저서를 살펴보면, "영향에 대한 불안, 독서 기술, 세계 문학 천재들, 해럴드 블룸 클래식 등이 있다." 이들 책 중에서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붙은 '세계 문학 천재들'은 나에게 고전과 현대의 문학에 대한 지평을 열어주었다.


나의 심각한 고민거리는, 이 세상에는 읽어야 할 책도 많고 지식들은 점점 끝없이 넘쳐나는데, 이를 따라가려는 나의 능력은 너무 부족하고 왜소한 상황이어서 나는 무척 답답한 심정이었다. 실제로 나는 과거 중학생 이후부터 문학책을 읽기 시작하여 겨우 대학 때까지만 소설과 에세이와 시 등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회사 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면서 나도 세이노 작가처럼 돈 버는 책에만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책들을 우리는 흔히 경영 서적, 자기 계발 서적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내가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지난해 12월 1일부터 내가 해야만 했던 일은, 대학 시절에 읽었던 중요한 문학책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고전 문학부터 현대 문학까지 다시 독파하기로 결심하고 이에 나의 모든 시간을 몰입하며 매달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해럴드 블룸이라는 평론가의 진가를 추적하였는데 그는 미국이 만들어낸 빛나는 보석이었다.


나에게 체계적인 독서의 방법을 제시하고 알려준 '해럴드 블룸'이 안내하는 대로 문학책에 빠져들면서 고전과 현대 소설을 망라하여 그가 정리한 대로 문학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가 이끌어주는 책들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당연하게도 주로 유럽과 영어권 문학책 중심이었다. 나는 그의 의견대로 읽어나가기 시작하여 영어권 소설을 넘어서 러시아 독일 프랑스 스페인 일본 중국 한국 등의 작가들에게까지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사실은, 오늘날 미국의 영향력이 대단한 상황처럼  영어권 문학이 다른 언어의 문학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월등히 높은 실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고, 영어권 문학이 훨씬 앞서나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미국 등의 영문학은 상당히 치열한 환경 속에서 나온 소산물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특히 여러 나라의 많은 작가들 소설에 깊이 빠져들수록 나는 '해럴드 블룸'이 주장하는 내용이 매우 일리 있는 평론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상 그처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자신감 있게 인류의 문학을 보다 객관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인류의 역사에서 이제껏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 전 세계의 문학가와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그를 최고의 문학 평론가로 칭송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제시한 대로 책을 읽으면서 그가 냉철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여러 평론이 매우 정확하다는 사실에 계속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덕분에 '미들 마치'라는 책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책 분량이 많아서 포기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반드시 읽어야만 했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여러 소설이 너무 어려워서 나의 지적 능력이 부족한 것에 한탄했으나, 해럴드 블룸은 토스토옙스키의 작가적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평론으로 나를 위안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대로 영어권 작가들에 비하여 한국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권 작가들이 실력면에서 상당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미국과 유럽과 동아시아의 많은 작가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가면서 나는 이런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고전은 차치하더라도 그가 추천한 윌리엄 포크너, 허먼 멜빌, 코맥 매카시,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 필립 로스 등뿐만 아니라 내가 찾아낸 제임스 조이스(물론 그도 추천한 작가이다), 리처드 포드, 힐러리 맨텔 등의 현대 소설을 읽으면서 그의 의견이 맞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게  되었다. 이런 책들을 읽다가 한국과 일본과 중국 소설 등을 읽어보면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 작가의 소설들은 절대로 가볍게 쓴 책들이 아니어서 책을 읽어갈 때마다 나의 가슴은 요동쳤고 뇌는 소용돌이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내가 많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영국과 독일 프랑스 라틴 아메리카 등의 작가들마저도 미국 작가들에 비하여 많이 약하며, 그나마 일본의 작가들은 한국과 중국의 작가들에 비하여 다소 수준이 높았지만 영어권 작가들에는 한참 못 미치는 상황이다.


인기 있는 한 작가를 거론하여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읽기 전에는 그가 유명하니까 그냥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의 책을 거의 15권 이상 읽고 나서, 또한 영어권의 여러 작가들의 책들을 많이 섭렵하고 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실력이 매우 초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의 작가들의 소설에서도 부족함을 자주 느끼곤 하였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일본과 한국과 중국에서 왜 인기가 있는지 지금도 매우 의아하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경험한 그는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고, 그 이후에 쓴 책들은 점점 더 형편없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왜 '1Q84, 먼 북소리,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해변의 카프카' 등을 썼는지 묻고 싶을 정도이다. 아마도 그를 신랄하게 비평하는 많은 일본의 평론가들도 내가 느꼈던 이런 사실들을 비슷하게 느꼈던 상황이었고, 냉정한 관찰자로서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한계에 관하여 그들 역시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가 특히 여성 독자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는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지 나는 참 난감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는 그를 좋아하는 여성 독자들이 많다는 것을 자주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한다. 그의 책 대부분을 읽고 나서 나는 그의 글 속에서 독자들에게 단순히 젊고 멋있게 보이려는 겉멋에만 유독 신경 쓰는 한심한 작가라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의 거의 모든 책에서 항상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나오는 '팝송, 와인, 위스키와 칵테일, 클래식 음악, 미국 메이저 프로 야구' 등을 확인할 때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이 이런 것들에 익숙해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넌지시 알리려는 그의 습성을 발견하고 나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소설이란 그 내용 속에서 작가 자신의 취향을 독자들에게 은연중에 뽐내면서 잘난 체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지 않은가. 해럴드 블룸은 당연히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을 것이고, 여기에 더하여 다른 일본이나 중국, 한국의 작가의 작품도 일부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해럴드 블룸이 동아시아 작가들에 대하여 관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판단을, 나의 적은 경험으로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이나 혹은 일본과 한국에서도 정말 가치 없는 책들이 인기를 구가하는 여러 상황을 보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상황에 대하여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요즘 흔한 방송 작가나 웹툰 작가처럼 글을 쓰는 작가는 아니기에, 그에 대하여 이처럼 길게 냉정한 평론을 해보았다.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분이지만, '해럴드 블룸'의 평론에 대하여 몇 가지 반론을 제시하고 싶다. 특히 그가 '의식의 흐름'이라는 소설의 방식에 긍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사실에 대하여 일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허먼 멜빌을 미국 현대 소설의 최고로 선정한 사실에 대하여도 나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허먼 멜빌보다 피츠 제럴드 혹은 헤밍웨이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나는 미국 문학에서 허먼 멜빌보다는 윌리엄 포크너가 더 훌륭한 작가라는 의견을 그에게 전하고 싶다. 나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을 사용하여  어렵게 글을 써 내려간 제임스 조이스, 허먼 멜빌에 관해서는 다소 실망하고 있지만, 반면에 윌리엄 포크너는 그들과 비교하면  의식의 흐름 기법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려 간 훌륭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나는 모더니즘 작가를 적극 선호하지는 않지만, 해럴드 블룸의 추천으로 읽은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와 '팔월의 빛'은 가히 천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책을 읽고 나서, 며칠 동안 나는 윌리엄 포크너의 다른 책들에 푹 빠져 살았다. 어떻게 한 작가가 이런 특이하고 대단한 소설들을 쓸 수 있는지 나는 윌리엄 포크너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톨스토이와 플로베르 등의 작가에만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해럴드 블룸을 만난 이후로 톨스토이와 플로베르 못지않게 문학의 역사에서 이들만큼 훌륭한 작가들이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흥분했다. 그들은 바로 윌리엄 포크너와 허먼 멜빌, 코맥 매카시,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 필립 로스 등과 내가 우연히 발견한 제임스 조이스와 리처드 포드, 힐러리 멘텔 등이다.


한편으로 해럴드블룸은 너무 보수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객관성이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그가 해리포터의 조앤 K. 롤링과 미저리의 스티븐 킹을 쓰레기 같은 글을 쓰는 작가라고 맹렬하게 비평한 사실에 나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차라리 소설 공장에서 글을 찍어내는 제임스 패터슨 같은 작가들을 비난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좀 이해할 수 있지만, 조앤 K. 롤링과 스티븐 킹은 나름 매우 뛰어난 작가들이라고 나는 자신 있게 그에게 반론하고 싶다. 물론 그가 이들 작가의 작품들에 대하여 이처럼 단호하게 평론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지만, 이들 작가의 작품 내용에 비하여 그의 비평은 좀 심한 편이다.


이런 다소 편협하고 보수적인 그의 평론에 대하여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노벨 문학의 선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그의 견해에 많은 사람들도 동의하고 있다. 이처럼 노벨 문학상의 위상에도 단호하게 부정적인 의견을 낼 수 있는 그의 논리적 자신감은 그를 한층 더 위대한 평론가로 인정받는 계기이기도 했다. 나는 타임지가 선정한 (그의 조언이 들어간) 10대 소설에 대하여 동의하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이 안에 안 들어간 사실이 좀 서운하기도 하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빼고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 월의 빛 혹은 내가 누워 죽어 있을 때'를 넣었어야만 했다. 물론 롤리타가 흥행하였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의 선정 방식에서는 인기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롤리타를 10대 소설에 넣은 것은 어쩌면 그의 의견이 아니고 타임지의 의견일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서 선정한 100대 문학은 출판사의 강권에 의하여 억지로 선정한 것이라고 하지만, 대체로 올바른 선정이라고 생각하며 바로 이 책을 통하여 나는 고전과 현대 문학을 정립하고 책을 읽어 나갔다. 한편 그가 선정한 100대 문학에서 이해할 수 없는 점도 있다. 이에 대하여는 앞으로 이어질 다음 편에서 천천히 다룰 예정이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인류 최고의 소설이라고 선정한 타임지의 결정은 (해럴드 블룸의 조언대로) 독자라면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그다음 작품으로 선정한 사실도 올바른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해럴드 블룸이 만약 '양귀자의 모순'을 읽어봤다면 동아시아에도 이런 훌륭한 책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어쩌면 유명한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들 같은 책만 읽고 나서, 동아시아의 문학서적에 실망을 하고 더 읽는 것을 포기하였는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제임스 패터슨에 실망한 것처럼, 냉철한 그가 일본의 작가에게 씁쓸한 경험을 하면서 동아시아 문학을 무시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요즘 '모순'을 읽고 나서 한국에도 이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였다. 나는 양귀자 작가님께서 다시 새로운 소설을 써서 우리 독자들에게 선물할 것을 간절히 고대해 본다.


요즘 다시 역행하여 '모순'이 인기를 끄는 상황은 한국의 독서 시장에 매우 긍정적인 훈풍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언론과의 모든 인터뷰를 완전히 차단한 것도 나름 멋있다. 요즘 실력 없는 작가들이 방송에서 내내 얼굴 비추는 일에 보기가 민망했기에 양귀자의 운둔은 토머스 핀천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새로운 작품이 내 귀에 다시 들리기를 기대하면서 이만 해럴드 블룸의 (1) 편을 마치고, 다음에 (2) 편에서 그와 관련한 내 의견을 이어서 쓰려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